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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성탄 1강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 요한복음 1:1-18 

요절/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메리 크리스마스! 요즘 서구권을 중심으로 성탄절 때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점차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크리스”가 그리스도라는 뜻인데 기독교적 색채가 있으므로 Happy holidays라는 말로 대체한다고 해요.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만이라도 성탄절 때 마음껏 구주 성탄을 축하해야겠습니다. 다함께 서로 인사해 봅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성탄 1강 말씀은 요한복음 1장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구주 성탄의 기쁨과 은혜가 우리 마음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신약 성경이 무슨 언어로 되어 있나요? 네, 그리스어입니다. 사실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자신들을 가리켜 헬라인이라고 하고 자신들의 언어를 헬라어라고 합니다. 우리도 Korea, Korean 이런 말을 우리 스스로는 안쓰고 대한민국, 국어 -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Korea라는 말 자체에 거부감은 없지만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라는 말에 식민지 국가라는 뉘앙스를 준다고 생각하고 거부감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성경은 헬라어로 씌였습니다. 본문에서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헬라어의 말하다 동사 ‘레고’의 명사형으로 그 의미는 ‘말씀’입니다. 사실 헬라어로 ‘사람이 하는 말(Word that is spoken)’은 ‘레마’라는 좋은 단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왜 저자 요한은 레마 대신 로고스라는 용어를 사용했을까요? 

 

사실 헬라인에게 로고스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힘든 일은 전쟁 노예에게 시키고 시간이 많았습니다. 시간이 많고 요즘같이 유투브 등 볼 것도 없어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생각하고 사고하고 추론하는 이 인간의 이성은 어디에서 왔을까, 봄이 되면 여름이 되고 여름이 되면 가을이 되고, 가을이 되면 겨울이 되고, 또 낮이 되면 봄이 되는 이 자연만물의 법칙은 어디에서 왔을까 곰곰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어떤 이성의 근원 (영어로는 the Reason)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고 그 이성의 근원을 ‘로고스’라 불렀습니다. 

 

과거 많은 성경학자들이 저자 요한이 의미한 것이 바로 헬라인들이 생각한 ‘로고스’로 보았습니다. 헬라인들이 생각했던 로고스가 바로 말씀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오늘날 복음주의적 요한복음 성경학자들(D. A. Carson 같은 분들입니다.)은 요한이 의미한 말씀이 헬라어의 로고스보다는, 히브리어의 ‘다바르’일 것으로 봅니다. 히브리어의 ‘다바르’는 말하다는 의미의 ‘다바르’ 동사의 명사형으로 역시 말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뜻으로 ‘사건’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인들에게 ‘다바르’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 하나님이 역사하신 사건을 의미했습니다. 종합해보면 ‘다바르’는 히브리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과 뜻을 드러내시는 수단, 혹은 어떤 사건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매개체”였습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과 접촉하는 매개체가 무엇입니까? 몸입니다. 눈으로 세상을 보죠.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과연 정확할까요? ‘착시현상’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도 대체로 눈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믿고 움직입니다. 또 손으로 물건의 감각을 느끼고 발로 이동을 합니다. 

 

다음으로 다른 사람과 소통할 때 꼭 필요한 매개체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language)’이죠.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Men are from Mars, women are from Venus)”라는 책도 있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가 같은 한국말을 하는데도 서로 전혀 소통이 안되는 경우가 있어요. 아내는 그냥 들어주고 공감해달라는 의미로 이야기하는데 남편은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의미로 듣습니다. 그결과 한 시간 동안 대화 후 남편이 화를 내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래서 뭐, 나보고 어쩌라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말씀 혹은 사건을 통해 세상과 접촉하시고 일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며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글로 전해주신 것이 바로 우리가 들고 있는 이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딱 이 한권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의 책을 한권으로 합쳐놓은 것이며 구약성경은 약 천년에 걸쳐 30여명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신약성경은 약 반세기에 걸쳐 약 9명의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1500여년의 세월에 걸쳐 약 40명의 저자에 의해 기록된 이 성경이 놀라운 일관성과 통일된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마치 톱니바퀴가 딱 맞는 것처럼 앞뒤가 딱딱 들어맞습니다. 앞에서 예언한 것이 뒤에서 성취되고, 앞에서 희미하게 드러났던 것이 뒤에서 명확하게 밝혀집니다. 그러므로 디모데후서 3:1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다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 세상과 접촉하시는 매개체는 하나님이 역사하신 사건입니다. 구약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삶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에스더’같은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라는 단어조차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합니다. 에스더서를 읽는 독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건의 흐름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합니다. 

 

정리해보면,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세상 모든 만물은 말씀이 매개체가 되어 창조되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In him was life, and that life was the light of all mankind.

 

헬라어는 생명이라는 말에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푸쉬케’입니다. 이것은 숨을 쉬고 심장이 박동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말의 ‘목숨’에 해당합니다. 다른 하나는 ‘조에’입니다. 이 ‘조에’라는 말은 한국말로 옮기기가 참 어려운데 많은 이들이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이라고 풀어서 번역합니다. 

 

우리모임에 전주 지역을 섬기시는 장아브라함 목자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교수이자 예술가이신데 얼마전 CTS 기독교 TV에 출연하여 간증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분에 의하면 예술가로서 이 세상의 근원이 무엇일까 깊이 사색하던 중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 만물의 근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분의 작품 설명을 잠간 들었는데 논리나 이성이라기보다는 가슴으로, 직관적으로 ‘아 정말 그렇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구나.’ 하는 것이 깨달아지고 받아들여졌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말씀 안에 생명, 곧 ‘조에’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조에’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경험적으로 볼 때 한 생명이 태어나기까지 먼저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물론 사랑없이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사랑이 원인이 되어 생명이 탄생합니다. 내가 태어난 원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랑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역시 사랑이며, 사랑하고, 사랑받기위해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조에’는 물론 생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사랑’과 아주 가까운, ‘사랑’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그런 단어가 아닐까요?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말씀 안에 나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말씀 안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과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리 모임이 처음 시작된 1961년 무렵 참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전쟁으로 많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후 베이비 붐 세대가 탄생했습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달래기 위해서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경제적 여력이 안되는 부모님들이 5명, 8명, 10명씩 자녀를 낳았습니다. 장남과 장녀는 부모대신 동생을 키워야 했습니다. 수많은 대한민국 장녀들이 콩나물 시루같은 남동생, 여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서독으로 간호사로 갔습니다. 말이 간호사지, 그곳에서 치매 노인들의 대소변을 받거나 시신을 닦는 참으로 험한 일을 했습니다. 비행기값이 비싸 휴가 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꿈도 못꾸던 시절 밤마다 외로움과 서러움에 복받쳐 베갯잎을 눈물로 적셨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분들이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던 중 많은 분들이 바로 요한복음 1:4절 이 말씀을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나니 그들의 삶이 동생들 뒷바라지 하기 위해 희생되는 삶이 아닌,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고 더 나아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서독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이 선교사로 보내신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울밑에 선 봉선화처럼 슬픔이 가득했던 마음에 큰 빛이 임하고 기쁨과 생명이 충만했습니다. 이 분들이 우리 모임의 최초의 선교사들이 되었습니다. 이 분들을 시작으로 오늘날 우리 모임을 통해 2천명의 선교사가 파송되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일반적으로 빛이 어둠에 비치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그러나 이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빛이 너무도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을 감추고 왔기 때문입니다. 

 

6-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하나님은 너무도 겸손한 모습으로 온 이 빛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것을 염려하시고 그 빛을 증거할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참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 역사가들은 이 세상의 역사를 논할 때 어떤 이들은 산업혁명을 역사의 큰 분기점으로 봅니다. 1차 산업혁명, 2차 산업혁명, 3차, 4차 지식혁명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들은 미신에 가까운 사고를 벗어나 인간의 이성을 기준으로 삼은 르네상스를 분기점으로 봅니다. 그러나 저자 요한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자신이 하나님이셨던 말씀, 그 안에 생명이 있었던 말씀, 사람들의 빛이 된 말씀, 온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 그 말씀이 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온 것을 가장 의미있는 사건이라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빛이 세상에 왔을 때 세상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세상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를 믿지 않았고 그를 멸시했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빛을 멸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이들은 그 빛을 영접했습니다. 그 이름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고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요 3:5)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말씀이 육신이 되어” The Word became flesh - 이것을 한자어로 ‘화육(化肉)’ 영어로는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14절은 1절과 연결됩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 하나님이셨던 말씀 - 그 말씀이 화육, 곧 육체가 되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창조주가 인간이 되어 자기가 만든 인간들 사이에 들어가 함께 사셨습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그 분은 바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저자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거닐었습니다.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주옥같은 말씀을 들었고 그 분과 함께 식사했으며 그 분이 하시는 일들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말씀, 하나님이셨던 말씀,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이 피조물이 되어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오늘날 영화같은 것을 보면 예수님은 뭔가 잘 생기고 카리스마 넘치는 멋있는 분인 것처럼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말씀을 보면 사실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외모만 보면 별로 카리스마도 없고 오히려 마르고 연약해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사야 53: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저자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셨으며,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하나님이셨던 그 분이 너무도 평범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셔서 자기와 함께 먹고 마시고 대화하고 함께 살을 맞대고 잠을 잤던 그 날들을 생각하며 감격에 겨워 외쳐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 외대 선배 중 윤레베카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1990년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선교사로 갔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이 오늘날처럼 OECD 선진국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대한민국과 나이지리아의 삶의 차이는 컸습니다. 아프리카 중에서도 무더운 나라인 나이지리아는 석유를 비롯한 자원이 풍부한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여러 요인으로 인해 늘 물과 전기가 부족했습니다. 에어컨 없이는 한밤 중에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더운데 밤에 전기가 나가면 조금이라도 차가운 시멘트에 몸을 비비면서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샴푸로 머리를 감다가 수도가 끊기면 난감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수도가 끊기면 큰 대야에 담긴 물로 밥하고 빨래하고 온 가족이 세수하고 양치질까지 다 해야 했습니다. 

 

이런 나이지리아 선교사 생활을 하면서 레베카 선교사님은 2천년 전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나이지리아는 중간에 끊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기도 들어오고 수도도 들어옵니다.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이동할 때 차량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는 팔레스타인 땅에 선교사로 오셨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은 낮에 너무 더워 보통 사람들이 시원한 그늘 속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쉼없이 팔레스타인 각지를 여행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샌달은 헤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나이지리아 선교사로 살면서 때론 불편하고 고생스러웠으나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를 생각할 때 선교사님은 깊은 감동을 받고 때론 눈물을 흘렸습니다. 

 

얼마전 아프리카 우간다의 임누가 선교사님이 우간다 주민 40만명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36회 아산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인터뷰 기사에서 임누가 선교사님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시계와 라디오를 고치며 살아온 우간다 한 주민이 백내장으로 앞을 거의 보지 못했어요. 빛만 겨우 감지할 수 있는 상태였죠. 한국에서는 백내장 증상이 조금만 나타나도 바로 병원에 가 수술을 받지만, 우간다 사람들은 의료 환경이 열악해 앞이 하나도 안 보일 때까지 수술을 못 합니다. 수술 시간이 30분이 채 안 걸리는 간단한 수술인데도 말이죠. 이 환자는 저와 제 아내의 무료 수술로 시력을 회복해 생업을 되찾았습니다. 이후 저희를 만날 때마다 고맙다며 닭, 오리, 고구마를 줍니다.”

 

젊은 시절 그는 대학병원 교수가 되었습니다. 교수로서 존경받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간다에 의료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는 후배 의사들에게도 의사로서 보람을 느끼고 싶다면 우간다로 오라고 조언했습니다: “우간다 빈민 지역에 진료를 보러 가면 주민들이 꽃을 뿌리면서 환대해요. 제가 대단한 의료 장비를 가지고 가는 게 아니라서 분에 넘치는 환대가 미안할 정도죠. 뇌전증, 뇌성마비로 움직이지도 못하던 아이가 제가 처방한 약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저와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게 됐을 때가 가장 기뻤습니다.”

 

기자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기사를 마무리합니다: “임 원장이 운영하는 베데스다 메디컬센터에서 나오는 수입은 거의 없다. 한국에서 임 원장 가족은 차도 없고 집도 없어 극빈 가정으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임 원장은 우간다에 간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제가 육십 평생 살면서 가장 잘한 세 가지를 꼽자면 첫째는 의대를 가 의사가 된 것, 둘째는 아내를 만난 것, 셋째는 우간다에 간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이러한 임누가 선교사님의 삶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큰 상을 주었습니다. 대학병원 교수의 자리를 포기하고 아프리카 최빈국 우간다에 의료 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한 것을 위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시간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의 그 모든 명예와 영광과 권세를 다 포기하고 이 땅에 사람이 되어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 자체가 엄청난 특권의 포기요 자기 희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겸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요즘 아무리 가난해도 아기가 태어나면 깨끗한 병원에서 침대에 눕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짐승들이 밥을 먹는 여물통에 눕히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아무 재산도 없이 세상적인 지위나 명예도 없이 가난한 전도자로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섬기셨고 병든 이들을 값없이 돌보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죄를 위한 대속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아니 온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분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합니까?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요즘 미국에서는 성탄절이 되면 더 이상 Merry Christmas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Merry Christmas 라는 말에 크리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독교적 색채가 있기 때문에 Happy holidays 라고 바꾸어서 인사한다고 합니다. 그저 성탄절은 선물교환하고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휴가 절기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을 넘어 아예 사람들의 말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 세상이 그러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만큼은 이 시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한없이 높이고 찬양합시다. 그를 경배합시다. 

 

15-18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까 1절에서 말씀을 어떻게 정의했습니까? 말씀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세상이 접촉하는 매개체, 혹은 contact point라고 했습니다. 많은 비기독교인들, 또 기독교인들이 묻습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시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나는 이미 내 자신을 너희에게 다 보여주었다.” 어떻게 보여주셨느냐고요?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낱낱이 보여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는 겸손하신 주님이십니다. 죄인들을 조건없이 사랑하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성탄절은 그저 선물을 주고받고 연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절기가 아닙니다. 성탄절은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절기입니다. 저희가 이 기쁘고 복된 성탄절 아기 예수님을 한없이 높이고 경배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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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2024 로마서 1강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롬 1장) Elijah 2024.09.23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