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로마서 10강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하리라" (롬 9:1-29)
2025.01.13 08:09
2025 로마서 10강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하리라
말씀/ 로마서 9:1-29
요절/ 로마서 9: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로마서를 보통 1~8장까지만 공부하고 9~16장은 잘 다루지 않습니다. 1~8장까지만 보면 너무도 완벽한 복음에 대한 해석이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9장을 읽어보면 갑자기 여러 복잡한 이야기가 나와서 8장에서 끝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도 작년 8장까지 하고 마침 성탄이 시작되어 8장까지만 하고 끝낼까 하는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어떤 성경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것이 원칙인지라 다시 마음을 다잡고 문제지를 만들기 위해 9장부터 16장까지 1차 본문 연구를 하였습니다. 이때 로마서 9~16장이 단지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날 신약 성도들을 위한 보배로운 말씀들이 가득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후반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신약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신 놀라운 진리를 배우고 은혜받는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복음을 영접한 성도들을 향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그 무엇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새한글번역) 마음껏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노래한 후 바울은 불현듯 지금까지 복음을 영접하지 않고 거절한 동포들이 생각났습니다. 9:1-3절을 새한글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참말을 하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도 성령님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합니다. 2내 슬픔이 크고, 내 마음속에 진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3차라리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께로부터 끊어지면 좋겠습니다. 내 형제자매들, 곧 혈통상의 내 겨레를 위해서라면요.”
저의 아버지가 80이 넘으셨는데 신장 투석을 받아야 한다는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신장 투석은 콩팥 기능이 정상인과 비교하여 15%이하로 떨어져 주 2~3회 병원에 가서 온 몸의 피를 깨끗하게 걸러내는 것입니다. 좀 자세히 알아보니 연세가 드셔서 신장투석을 시작하면 삶의 질이 크게 떨어질 뿐 아니라 얼마 못 사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장남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8톤 트럭, 또 택시 운전하며 죽어라 고생해서 아들을 서울에 있는 대학에 겨우 보냈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부르심을 따라 가난한 캠퍼스 사역자가 된 것에 대한 실망감이 너무도 컸습니다. 너무 화가 택시 운전을 하면서 만약 손님을 전도를 하면 그 자리에 돈을 안받을테니 당장 내리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기독교에 대한 태도가 많이 좋아지셨지만 여전히 복음을 인격적으로 영접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아버지를 볼 때 저의 마음에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저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했던 많은 분들이 이런 아픔을 경험합니다. 바울에게도 이런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불살라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는 모습을 볼 때 그의 마음에 보람과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복음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어 멸망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유대인 동포들을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은 큰 근심과 고통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출애굽의 모세와 같은 마음이 되어 만약 동포가 구원받을수만 있다면 나는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져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이 말씀을 새한글번역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4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아들딸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영광을 보이시고 여러 언약을 맺어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시고 예배하는 법을 알려 주시고 여러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5그들은 위대한 조상들의 후손이고, 혈통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도 그들한테서 나셨습니다. 모든 것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영원토록 찬양받으시기를! 아멘!”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바울의 동포인 유대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 곧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딸로 삼으셨습니다. 오직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여러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거룩한 율법을 주시고 예배하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법을 몰랐던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신을 섬겼습니까? 작두타는 무당을 불러 굿을 했습니다. 돼지에 삼지창을 꽂고 그 위에 돈을 뿌리고 복을 빌었습니다. 무당을 천한 사람이라 업신여기면서도 안좋은 일이 생기면 무당을 찾아가 귀신을 달래려 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 민족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법을 알지 못해 귀신에게 절하고 굿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으로 오셨습니다.
여러분, 작년 노벨문학상 작가가 누구였습니까? 한국인 작가 ‘한강’이었습니다.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할 때, 스웨덴 스톡홀롬 한림원 발표장에서 마츠 말름 한림원 상무이사의 입에서 South Korean author HanKang!이라는 말이 터져나올 때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 기쁨을 느꼈습니까! 노벨상 수상자 결정이 난 후 평소에 책을 잘 안읽던 많은 젊은이들이 이번이 아니면 언제 노벨문학상 작가의 책을 “원서”로 읽어볼 수 있겠냐며 서점에 달려갔습니다. (원문이 한국말이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유대인으로 오셨습니다. 유대나라에 태어나셨고 당시 유대인들이 쓰던 말을 모국어로 배우셨고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성장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 한국말을 하시고 그래서 성경원문이 한국말로 되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번에 새한글성경이 나왔는데 사실은 이 한글이 처음 성경 기록자가 기록한 원문이라면요! 그래서 원문읽기를 사모하는 전세계 수많은 성도들이 원문을 읽으려고 열심히 한글을 공부하고 있다면요!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유대인들에게 바로 그런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특권을 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습니다. 복음을 거절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리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단지 거절했을뿐만 아니라 복음을 대적함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자, 여기에서 한 가지 중대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에 관한 한 하나님은 실패한 것입니까?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의 긴 내용이 사실은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입니다.
6-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새한글성경 번역을 보겠습니다: “6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소용없게 되었다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이스라엘한테서 난 이 사람들이 모두 이스라엘은 아니니까요. 7또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인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삭의 후손이어야 너의 후손이라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8다시 말해서, 육신에 의한 자녀들,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 약속에 의한 자녀들이 후손으로 여겨집니다. 9약속의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요. “내년 이맘때 내가 다시 오겠다. 그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은 창세기 내용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모르는 분들도 있기에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대 민족은 본래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조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75세였고 가업을 물려줄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고,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해주고, 너를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고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도 큰 민족은 커녕 딸자식 하나 없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부인과 상의한 끝에 하녀였던 이집트 여자 하갈을 첩으로 들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로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내가 약속한 씨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너의 부인 사라를 통해 낳은 아들이 약속의 자녀라고 하셨습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다시 올텐테 그때 너의 부인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과 사라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내가 나이가 100살이고 아내가 90이 넘어 갱년기가 왔고 생물학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한데 어떻게 나와 내 아내가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웃는 것을 아시고, 왜 웃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이삭 - 곧 웃음으로 짓도록 하셨습니다. 이삭을 낳을 때 약속이 성취됨을 체험함으로 큰 기쁨을 누리고 웃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포인트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여러 아들을 낳았지만 오직 이삭만이 약속의 자녀였습니다.
10-13절을 보십시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새한글성경 번역을 보겠습니다: “10그뿐만 아니라 리브가가 한 사람, 곧 우리 조상 이삭과의 사이에서 쌍둥이를 가졌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11쌍둥이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무슨 선한 일이나 못된 짓을 하지도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때 선택에 기초하여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계획이 유지되도록 하셨습니다. 12아이들이 한 일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에게 달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큰아이가 작은아이를 섬길 것이다.” 13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는 대로입니다.
“야곱은 내가 사랑했지만,
에서는 내가 미워했다.””
이삭의 예를 듣고 사람들은 아버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인데 어머니가 약속을 받지 못한 경우 약속의 자녀가 되지 못하는 것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삭은 나중에 리브가와 결혼을 했습니다. 리브가는 명백히 하나님이 택하시고 사랑하신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그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뱃속의 아기 중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동생 야곱은 내가 사랑했으나 형 에서는 미워했다.”
리브가가 낳은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은 같은 아버지, 같은 어머니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택함을 받았고, 한 사람은 택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이 사람의 혈통을 따라 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증명해 줍니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두 아이가 아직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택함받을만한 무슨 선한 일이나, 택함받지 못할 악한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택함받은 동생 야곱이 엄마 뱃속에 도대체 무슨 선한 행동을 했겠습니까? 엄마가 탯줄을 통해 음식을 공급해주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했을까요? 나는 태어나면 절대로 게임도 안하고 공부열심히 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신앙생활 잘 하겠다고 결심했을까요? 이에 비해 에서는 엄마 뱃속에서 무슨 악한 일을 했을까요? 태어나기만 하면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집을 떠나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결심했을까요? 그랬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우리가 생각하고 알아야 할 것은 구약에서 택하심은 구원과 영생에 관한 택하심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세계 온 백성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제사장 백성의 택하심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넓게 보면 그것이 구원으로 연결되지만 일단 구약에서의 택하심은 여러 민족 중 제사장 민족의 택하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한 회사의 회장이 있는데 그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 중 한 아들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택함받지 않은 아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택함받지 않은 아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하거나 택함받은 아들을 도와주고 싶으면 그 회사에 취업하여 도와주면 됩니다. 예컨대 택함받지 못한 에서는 동생을 영적 제사장으로 인정하고 동생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을 말씀을 잘 받고 순종하면 됩니다.
이 정도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예를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성패가 결코 사람의 뜻이나 행위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훌륭한 축구 감독이 있습니다. 요즘 베트남의 박항서 감독, 그의 수제자인 김상식 감독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큰 대회에서 베트남의 숙적 태국을 이기고 우승컵을 안겨주어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감격과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아무튼 훌륭한 감독이 있어 좋은 작전을 세웠습니다. 문제는 선수들이 감독의 생각과 작전을 얼마나 이행하고 실전에서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놀라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종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그 계획을 실행하면 좋은데 영적으로 머리가 안 좋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사람의 행위와 성공여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15-18절을 보십시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새한글성경 번역을 보겠습니다: “15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니까요.
“나는 내가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내가 가엾게 여기고 싶은 사람을 가엾게 여길 것이다.”
16그러므로 선택받는 것은 사람의 바람이나 노력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17성경이 파라오에게 이렇게 말하잖아요.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운 것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다. 곧 너를 통해 내 능력을 드러내 보여 주어, 내 이름이 온 땅에 널리 알려지게 하려는 것이다.” 18그러므로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마음이 굳어지게 하고 싶은 사람을 마음이 굳어지게 하십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작가나 감독이 배우를 뽑을 때 물론 주인공도 정말 신중하게 뽑지만 악역을 뽑을 때 주인공못지 않게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좋은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서는 주인공 못지 않게 악역이 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역이 관객으로 하여금 분노로 치가 떨릴 정도로 만들어야 그 영화나 드라마가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악역을 맡은 사람에게 큰 상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만약 바로(파라오)가 이러한 악역의 역할을 충분히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출애굽기에 총 10가지 재앙이 나오는데 만약 바로(파라오)가 중간에 마음이 약해져 예를 들어 재앙을 한 절반만 받고 하나님께 항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출애굽기에 기록되고 수많은 영화로도 만들어진 홍해 바다가 갈라져 육지가 되는 기적을 보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절기인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유월절 절기도 제정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가 그 마음을 심히 교만하게 먹고 하나님과 맞장을 뜨고 나라가 다 망하더라도 갈데까지 가보자 - 마음을 먹은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출애굽에 기록된 그 모든 사건을 체험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영광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만약 악역을 맡은 배우가 감독이나 작가가 써준 대본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영화지만 이렇게까지 악하게 해서는 안되겠다 스스로 생각하고 연기를 좀 약하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영화를 망치게 됩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악역을 맡은 바로(파라오)로 하여금 하나님이 미리 써둔 대본대로 하도록 강요하셨다거나, 협박을 하셨다거나 -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많은 성경학자들이 하나님이 일부러 바로(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파라오) 스스로 완악한 마음을 먹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내버려두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해석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현재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하나님은 마치 영화 감독이 영화의 모든 내용을 자기 뜻대로 이끌어가는 것처럼 인류역사를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영화를 만든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온 세계에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선한 일을 맡은 역할도 세우시고, 악역도 세우십니다.
이것을 통해 지금 바울이 말하려는 요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역사에 한 걸음 떨어져 관망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역사에 개입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 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결코 실수나 실패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전에 한 복음송가 가수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제가 불러보고 싶지만 너무 옛날 고려짝 노래부른다고 좋아하지 않는 분이 있을 수 있어서 자제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결코 실수가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처럼 보이는 사건도,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악한 자들도 사실 알고 보면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는 데 기여하는 배우에 불과합니다. 그가 악행을 더 크게 하면 할수록 더 크신 하나님의 뜻이 더 잘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히 머리가 좋은 학생들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머리나쁜 학생들은 조는데 머리좋은 학생들은 예리한 질문을 던집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고 사실 머리가 좋든, 나쁘든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아니, 모든 것이 다 하나님 맘대로라면 바로(파라오)가 무슨 죄입니까. 왜 하필 악역을 맡아서 그런 꼴을 당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의 악행에 대해 심판하시는 것이 정당합니까?”
20,21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0아, 사람아! 도대체 그대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말대꾸하며 대들다니요! 만들어진 것이 만든 사람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나요?” 하고 따지겠습니까? 21아니면 진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게 권한이 없단 말입니까? 같은 진흙덩이에서 어떤 것은 값지게 쓸 그릇으로, 어떤 것은 하찮게 쓸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요!
바울은 따지는 사람에게 토기장이 곧 진흙을 빚어 그릇 만드는 사람이 가진 권한을 예로 듭니다. 토기장이는 진흙을 빚어 자기 뜻대로 어떤 진흙은 귀한 손님 접대할 때 쓰는 꽃무늬있는 아름답고 귀한 그릇으로, 어떤 그릇은 평소에 막 쓰는 그릇으로, 어떤 그릇은 밤에 잠자다가 소변 마려울 때 쓰는 요강으로 만듭니다. 어떤 진흙을 어떤 그릇으로 만드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권한입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디서든 일정한 권한을 인정합니다. 조그만 회사의 사장이 이번 구정을 맞이하여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줄지 말지, 주면 얼마를 줄지 결정하는 것은 사장의 권한입니다. 보너스가 작다고 직원들이 뒤에서 궁시렁 궁시렁 거릴 수는 있으나 사장에게 대놓고 따지지는 않습니다. 하다못해 동네 아줌마들이 만든 계모임에서 세운 회장도 일정한 권한과 권위를 인정해줍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창조주로서 일정한 권한과 권위가 없겠습니까!
여기에서 바울의 관심은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여러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닙니다. 바울의 관심은 창조주 하나님에게 창조주로서 권한이 있으며, 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결코 실수나 실패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23-26절을 보십시오.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새한글성경 번역을 보겠습니다: “23어떻단 말입니까? 영광을 누리도록 미리 준비해 두신 그릇들, 곧 불쌍히 여기심을 받을 그릇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풍부함을 알리시려고 하셨다면요. 24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실 그릇들로 우리도 부르셨습니다. 유대아 사람들 가운데서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도요. 25호세아서에서도 말씀하시는 대로입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사람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를 사랑받는 여자라 부를 것이다.
26또한 그들에게 ‘너희들은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말씀하시던 곳,
거기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딸이라 불릴 것이다.”
이 부분은 특히 새한글성경 번역이 이해에 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놀라운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의 풍부함을 알릴 그릇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토기장이가 여러 진흙을 가지고 어떤 진흙으로는 귀한 손님을 모실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고, 어떤 진흙으로는 또 다른 필요한 그릇을 만들듯,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여러 진흙으로 사람을 지으실 때, 다른 사람은 어떤 용도로 지으셨는지 모르나, 최소한 여러분들만큼은 일생을 살면서 다른 일 하지 말고, 평생 하나님을 배우고 내가 배운 하나님을 이웃에게 전파하는 일을 하도록 지으셨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그 어떤 일보다 예배드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자리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생명(生命)이라는 한자어에 대한 풀이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분에 의하면 생명이란 “살아라 하는 명령”이라고 합니다. 참 좋은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살아라” 하시는 창조주의 명령입니다.
여러분은 왜 태어나셨습니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태어나셨습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난척 하려고 태어나셨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은 일생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배우고 그 하나님을 세상에 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그 용도를 위해 토기장이신 하나님께서 진흙을 가져다가 여러분의 눈과 코, 입, 손과 발, 몸을 빚으셨습니다. 나를 향한 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