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로마서 11강 "말씀이 네게 가까워" (롬 9:30-10:10)
2025.01.19 15:21
2025 로마서 11강
말씀이 네게 가까워
말씀/ 로마서 9:30-10:10
요절/ 로마서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말콤 글래드웰이 쓴 ‘아웃라이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1997년 8월 발생했던 대한항공 801편 괌 추락 사고의 원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가 파악한 사고의 원인은 놀랍게도 ‘한국문화’에 있었습니다. 당시 기장은 무리한 일정으로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부기장과 기관사는 악천우 가운데 여러 위험 요소를 발견하고 기장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장의 권위와 자존심을 배려하여 직접적으로 경고하지 않고, 빙 돌려서 말한 것이었습니다. 기장은 비가 많이 오지만 구름을 뚫고 나가면 활주로가 보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부기장은 비가 너무 많이 오기 때문에 구름을 뚫고 나가도 활주로가 보이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해야 하는데, “비가 정말 많이 옵니다.” - 이렇게 돌려서 말했습니다. 이후 기관사는 기장이 판단을 잘못하는 것 같아서 레이다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기장님, 육안에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레이다를 보셔야 합니다.” -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대신 “오늘 기상 레이더 덕 많이 봅니다.” -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빙 돌려서 말하면 알아듣기를 기대했으나 불행하게도 피곤했던 기장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부기장과 기관사가 몇 차례 힌트를 주었으나 기장이 알아듣지 못한 상황이 지나간 후 비행기는 괌 니미치 힐에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총 253명의 탑승객 중 228명이 사망했습니다. 사고 후 원인분석에 나섰고 사고원인의 최종결론은 ‘빙돌려 말하는 한국문화’였습니다. 이후 대한항공은 델타항공의 데이비드 그린버그를 부사장으로 영입한 후 조종실에서 한국말을 금지하고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영어로 하도록 했습니다. 이후 대한항공의 사고율이 세계적인 항공사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메시지를 시작하기 전 제가 이 예화를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앞선 사람들의 실패를 통해 교훈을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은 신앙생활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왜 실패했을까요? 그들의 실패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유대인들의 실패의 원인을 발견하고 교훈을 발견하는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9:30-3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새한글성경을 보겠습니다. “30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의를 뒤쫓아 구하지 않은 민족들이 의를 얻었습니다. 믿음에 기초하여 얻는 의를 말입니다. 31그런데 이스라엘은 의로 이끄는 율법을 뒤쫓아 구했지만 율법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32무엇 때문입니까?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 행위에 기초하여 그것을 뒤쫓아 구했기 때문입니다. 걸림돌에 걸린 것입니다. 33성경에 적혀 있는 대로입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 걸림돌, 곧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둔다.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창피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했는데 실패한 원인이 무엇이라 진단합니까? 개역개정의 표현에 의하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새한글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 행위에 기초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들이 가장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했던 율법이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안식일 일하지 말라는 율법과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고 정결한 음식을 먹으라는 율법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이 되면 엘리베이터가 자동으로 모든 층에 섭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것은 일에 해당하기 때문에 안식일날 엘리베이터가 한 층, 한 층 다 서는 것입니다. 골수 유대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 아래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일에 해당하기 때문에 아예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고 해요. 또 안식일날 음식을 조리하면 안되기 때문에 그 전날 안식일 먹을 하루 음식을 미리 다 준비해 놓는다고 합니다. 또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신 음식을 코셰르 음식이라고 불렀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깨끗한 코셰르 음식을 먹는다는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부정한 음식, 예를 들어 돼지고기나 미꾸라지를 갈아만든 추어탕 - 이런 음식을 먹는 이방인들을 아주 더럽고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에 대해서는 특별의식과 우월감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유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 20장) 한 포도원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날 하루 포도밭에 일할 일꾼을 구하러 장터로 나갔습니다. 당시에는 해가 뜨는 오전 6시부터 해가 지는 오후 6시까지 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주인은 몇 사람의 일꾼들에게 하루 품삯 - 오늘날로 하면 한 20만원 정도 되겠죠. - 을 약속하고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주인은 일꾼이 더 필요했는지 오전 9시에 다시 장터로 가서 품삯을 약속하고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주인은 낮 12시, 오후 3시, 심지어 일을 다 마치기 1시간 전인 오후 5시에도 그날 일자리를 찾지 못해 놀고 있던 사람들을 발견하고 역시 품삯을 약속하고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자, 드디어 오후 6시가 되었고 하루 일과가 끝났습니다. 주인은 수고했다고 말하고 그들에게 하루 품삯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인은 오후 5시에 와서 딱 1시간 일한 사람에게 하루 품삯 20만원을 주었습니다. 이것을 지켜 본 다른 사람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주인은 오후 3시 온 사람에게도 똑같이 20만원을 주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새벽 6시에 와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도 똑같이 20만원을 주었습니다. 이때 20만원을 받은 새벽 6시부터 하루종일 일한 사람들이 화를 내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하루종일 땡볕에서 땀흘리며 고생하고 일했는데, 왜 우리하고 딱 1시간 일한 저 사람들하고 똑같이 대우하느냐며 주인에게 투덜거리고 불평을 했습니다. 이때 주인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나는 당신들과 약속한 하루 일당을 주었습니다. 내가 포도원 주인으로서 내 돈을 가지고 내 맘대로 못합니까? 왜 그것에 대해 당신들이 나에게 화를 내지요? 나는 다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내가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당신이 나에게 화를 낼 무슨 권한이 있지요?”
주인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비유에서 그 직접적인 이유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주인은 하루종일 논 사람이 고의적으로 놀고싶어서 논 것이 아니라, 일을 하고 싶지만 일자리가 없어 논 것을 고려했을 것입니다. 또 만약 1시간 일했다고 2만원만 주면 그 돈으로 다음날 밀린 월세도 내야 하고 전기세, 수도세, 애들 등록금까지 감당할 수 없어 굶게 될 것을 고려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주인이 그렇게 한 마음의 동기는 아름답고 선한 것이었습니다. 일꾼을 향한 주인의 배려와 사랑이었습니다. 반면 불평한 일꾼들은 하루종일 일한 자기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준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주인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비유가 바로 유대인들의 실패의 원인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유대인들 중 가장 율법을 잘 지키지 않던 세리와 창기들을 그동안 열심히 율법을 지켰던 사람들과 동일하게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그동안 율법을 열심히 지켰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끝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10:1-4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새한글성경을 보겠습니다: “1형제자매 여러분, 내 마음의 갈망, 곧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매달려 드리는 기도는 그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2내가 증언하는데,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정은 바른 깨달음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3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애쓰다가, 하나님의 의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사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끝마침이 되셔서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의를 가져다주셨는데도 말이지요.”
유대인들이 실패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애쓰다가 하나님의 의에 굴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자기 의를 세우기 원할까요? 그래야 텅빈 내 내면이 채워지고 자존감이 올라간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창세기를 읽어보면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이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신을 가린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공공장소에서 벌거벗은 몸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짜피 부부사이인데 벌거벗은 것이 무엇이 부끄럽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낀 것은 그들 안에 부끄러운 죄가 가득한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죄가 있으므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서점을 가서 책을 보거나 유명 강사의 강의를 들어보면 자존감에 관련된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겸손과 낮은 자존감은 다르다, 사람이 겸손해야 하지만 자존감은 높아야 한다.” -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자존감이 높다는 것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거울을 보고 “나는 못생겼어, 나는 무능해, 나는 너무 찌질해.” - 이런 생각이 마음을 압도한다면 자존감이 낮은 것입니다. 반면 “나는 이런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이런 장점이 있어. 아니, 장점과 단점을 다 떠나서 나는 내 모습 이대로 가치가 있어.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야.” -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수치심으로 가득하여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린 아담과 하와처럼 엄청나게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너무도 찌질하게 느껴지고 내 존재 자체가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생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리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유교 문화권인 대한민국에서 전통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사용한 무화과나무 잎은 높은 학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명문대 졸업장이 있으면 자존감이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실패했으면 내 자식대에라도, 자식이 실패했으면 며느리나 사위라도, 그것도 안되면 손주를 통해서라도 명문대 졸업장, 박사, 변호사, 의사같은 전문직 면허증을 통해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 자존감을 높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 알아주는 것들을 무화과나무 잎을 삼아 자신을 가리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은 아니죠. 그래서 대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들을 비판하고 비난함으로, 다시 말해 남들을 깎아내리고 남들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만듦으로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을 열심히 지키던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비판과 비난을 많이 했는지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이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지만 내면이 공허했습니다. 자기 안에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이 가득한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과 세리들, 창기들을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그 비난을 통해 자신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기 원했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벨탑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늘에까지 닿는 거대한 바벨탑을 건축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더 이상 바벨탑 건축을 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를 흩어버리셨습니다. 서로 대화가 되지 않도록 하여 이 일을 중단하도록 하셨습니다. 바벨탑을 세우기 원했던 인간의 심리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수치와 절망을 감추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바벨탑을 쌓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더 나아가 바벨탑 꼭대기에 올라가 있으면 뭔가 인간의 수치와 한계, 절망을 극복하고 신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뉴욕 맨하탄처럼 멋진 빌딩을 짓고 그 안에 들어가 넥타이를 매고 일하면 자기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멋진 빌딩도, 목에 멘 넥타이도 모두 자신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려주는 무화과나무 잎에 불과합니다. 곧 말라버리고 떨어지는 무화과나무 잎처럼 이러한 것들은 근본적으로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려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근본적으로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려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예수님이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려주시는 나의 의가 되십니까?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외모가 세상적인 기준에서 좀 별로여도, 내 학벌이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데, 여러분 내 외모나 인간조건, 스펙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차별대우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기분 좋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기분 나쁘죠. 친구들이 “너는 생긴게 왜 그렇게 생겼냐” 놀리면 누가 기분 좋겠습니까? “너는 그 나이에 아직도 월세 사냐” - 이런 말 듣고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 드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자기 의로 삼는 사람은 그 말을 들을 때 잠시 기분은 나쁠지언정 근본적으로 자존감이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나의 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무시하고 하찮게 여겨도 예수님은 나를 세상에서 유일하고, 그래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전혀 떨어지지 않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자존감이 높은지 낮은지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 중 글씨를 써보도록, 혹은 자신을 그림으로 그려보도록 한다고 합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글씨를 써도 개미가 기어가는 것처럼 조그많게 쓴다고 해요. 자기를 그려보라고 하면 조그많게 그린다고 해요. 그것이 꼭 맞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심리학자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저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어디를 가든 자신감이 있고 당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신감과 당당함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남들이 알아주는 세상 스펙, 인간적인 능력, 지식에서 나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까?
5-7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새한글성경을 보겠습니다: “5모세는 율법에 기초해서 얻는 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것들을 실행한 사람은 이것들 덕분에 살아갈 것이다.” 6그러나 믿음에 기초해서 얻는 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 마음속으로 ‘누가 하늘로 올라갈 것인가?’ 하고 말하지 마라.” 그런 말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내려와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7또는 “‘누가 밑바닥 없는 구덩이(무저갱)로 내려갈 것인가?’ 하고 말하지 마라.” 그런 말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모시고 올라와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있는 라고스 대학생들이 우리 선배이신 윤레베카 선교사님을 통해 복음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라고스 대학생들이 윤레베카 선교사님을 만나려고 배타고 인도양을 건너왔습니까? 아니면 몇달치 월급을 모아 비행기타고 한국으로 왔습니까? 또 윤레베카 선교사님이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몇 년에 걸쳐 한국말을 배웠습니까? 아닙니다. 윤레베카 선교사님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직접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또 그들이 본인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영어를 배워 영어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우리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늘에서 이땅으로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할까봐 최대한 쉽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새한글성경을 보겠습니다: “8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네 가까이에 그 말씀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속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선포하는 바로 그 믿음의 말씀입니다. 9곧 그대가 입으로 주 예수님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 살리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10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얻는 길은 너무 쉽고 너무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불로초를 구하려 온 세계를 찾아다닌 진시황제처럼 수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는 것같은 수고와 고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수고와 고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 귀에 들려오는 복음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됩니다.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 앉으셨다는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의가 나를 향한 세상의 모든 비난과 정죄로부터 나를 가려줄 방패막이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함정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얻는 길이 너무 쉽고 너무 가까이에 있다는 - 바로 이것이 함정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죽어라고 공부하고 투쟁하고 몇 년의 세월을 거쳐 준비하고 노력하고 피를 쏟는 투쟁 끝에 바라던 대학에 갔다 - 그래야 좀 뽀대도 나고 가치가 있게 느껴지잖아요. 그냥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 잘 듣고, 어떤 수험생 말처럼 교과서만 열심히 보았더니 바라던 대학에 갔다 - 그러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엄청 노력하고 고생한 끝에, 내 모든 것을 쏟아부은 후 어떤 성취를 이루었다 - 그래야 자랑거리가 되잖아요.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노력과 헌신, 자신이 가진 능력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내가 좀 특별한 사람이 되고, 특별한 존재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생각 때문에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가지 못하고 중간에 넘어집니다. 아까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나온, 새벽 6시부터 하루종일 땡볕에서 일한 품꾼처럼 주인으로부터 특별대접, 특별대우 받기를 기대하고 만족할만큼 특별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느낄 경우 주인에 대해 불평과 원망, 분노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삶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길이면서, 역설적으로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에 끝까지 가기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예전에 메멘토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라는 특이한 병에 걸렸습니다. 그 결과 지나간 일을 다 잊어버리고 딱 10분밖에 기억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지나온 나의 삶의 여정 중 잘했던 것, 못했던 것에 대한 모든 평가는 다 하나님께 맡기고 지금 현재 나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크게 성공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긴 것이 있습니까? 혹은 크게 실패하여 부끄러움을 남긴 것이 있습니까? 그 모든 것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께 맡깁시다. 크게 성공한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큰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된 것일 수 있습니다. 크게 실패한 것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실패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도록 하신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평가를 하나님께 맡깁시다. 그 성공이 나를 자만하지도 않게 하고, 그 실패가 나를 위축되지도 말게 합시다. 다만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 감사하고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