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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로마서 12강

 

 

세상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말씀/ 로마서 11장 

요절/ 로마서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얼마전 한 기독교 통계 자료를 분석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각 종교에 대한 호감도를 조사했는데 개신교가 14% 나왔습니다. 불교가 개신교보다 훨씬 높은 것은 물론이고, 개신교에 비해 포교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원불교가 18%였습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만 있어도 최소한 18%는 나온다는 이야기인데 14%가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국민들에게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다른 통계에 의하면 한국 청년 대학생들 가운데 개신교 신자의 비율이 역시 14%라고 합니다. 문제는 그중 약 42%가 이른바 가나안 신자(교회에 안나가는 신자)라는 것입니다. 실제 캠퍼스에서 청년 사역을 섬기는 사역자들이 체감상 느끼는 대학생 중 개신교 신자의 비율은 100명중 3명, 많아야 5명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 모임도 예전에는 매년 풀타임 스탭 자원자들이 10여명 가까이 있었습니다. 또 그들의 나이가 대부분 싱싱한, 파릇파릇한 20대였습니다. 간혹 30대인 분이 신규 스탭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러면 바로 위 기수의 선배들이 매우 난감해 했습니다. 왜냐하면 스탭 수양회 때 막내에게 커피 서빙하고 의자정리하는 등 잡일을 시켜야 하는데 30대 나이많은 졸병, 아니 신입 스탭에게 이런 잡일을 시키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스탭 자원자가 없어요.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스탭 자원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나이 40이 넘기까지 커피 서빙하고 잡일하면서 고생하던 막내 스탭들이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새로 들어온 스탭이 40대 중반이었습니다! 

 

지지난 해 제가 전국 스탭 목자 모임에서 대표 소감발표를 했거든요. 그런데 단상에 올라가 보니까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가득 있는 것입니다. 제가 소감을 발표했는데 예전같으면 내용에 은혜를 받아 청년의 음성으로 우렁차게 아멘 했는데 지금은 노인 음성의 저음으로 ‘아멘’ 소리가 났습니다. ‘야, 이러다가 우리 모임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심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저에게, 또 비슷한 고민을 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결코 실패가 없으시고, 후회가 없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복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새한글 성경을 보겠습니다: “1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내치셨다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 역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베냐민 지파입니다. 2하나님은 미리 선택하신 자기 백성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엘리야와 관련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알지 못하십니까? 엘리야가 이스라엘에 맞서 하나님께 이렇게 하소연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3“주님, 그들은 주님의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주님의 제단을 완전히 파헤쳤습니다. 이제 저만 혼자 남았는데, 그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노리고 있습니다.” 4그러나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알려 주신 대답은 무엇입니까? “내가 나를 위하여 7,000명을 남겨 두었다.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들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5그러므로 그처럼 지금 이때에도 은혜로 선택하여 남겨 두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이대로 유대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인가? 이때 하나님은 바울에게 역시 비슷한 고민을 했던 엘리야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엘리야의 이야기는 대부분 잘 아시지만, 잘 모르는 분도 있기에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엘리야 시대 때 이세벨이라는 악명높은 왕비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정치적인 이유로 외국에서 시집 온 여자였는데 남편 아합 왕을 꼬드겨서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국교로 채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전국에 있는 여호와의 제사장과 선지자를 전부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포교 정책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고문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합왕에게 가서 앞으로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왜 하필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을 예언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세벨이 믿는 바알신이 비를 내려주는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비가 내리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엘리야를 어떻게 먹여 살리셨습니까? 그릿 시냇가에 아직 마르지 않은 시내가 있으니 그 시냇물을 마시도록 하셨습니다. 음식은 어떻게 해요? 배달의 민족 기사로 까마귀를 하나님께서 소집하셨습니다. 그 까마귀를 통해서 떡과 고기를 배달시켜주셨습니다. 왜 하필 까마귀일까요? 까마귀는 자기 배고픈 것 못 참거든요. 그런데 그 까마귀가 자기 배고픈 것을 참고 떡과 고기를 엘리야에게 갖다 준 것입니다. 

 

이후 그릿 시내가 말랐을 때 그때 어떻게 하셨어요? 가난한 과부에게 가서 빌붙어 먹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 과부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엘리야의 믿음을 성장시키셨습니다. 

 

이후 엘리야는 한 3년 정도 지나서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가서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제단을 만들어놓고 불을 내리는 신이 진짜 신이다. 어떠냐?” 도전했습니다. 아합은 도전장을 받아들였을까요? 안받아들였을까요? 성경을 보면 아합왕은 별로 머리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별 생각없이 어떻게 되겠지 하고 도전장을 받아들였습니다. 먼저 아합의 선지자들, 곧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제단에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오후가 될 때까지 떠들고 춤추고 심지어 칼로 몸에 피가 나도록 하면서 기도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후 엘리야가 링에 올라갔습니다. 엘리야는 불을 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습니다. 불은 제단 주변에 가득한 물을 다 태우고 번제물을 다 태웠습니다. 이 모습을 본 그동안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던 백성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엎드려 경배하며 고백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엘리야가 다시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천둥이 치며 큰 비가 내렸습니다. 신이 난 엘리야는 수십 킬로미터를 빗 사이를 가르며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 소식을 들은 희대의 악녀 이세벨은 엘리야를 반드시 내일 중으로 죽이겠다고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야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40일동안 밤낮을 쉬지 않고 걸어간 엘리야는 마침내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하소연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만 남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 하나님을 떠나고 나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마저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아니다, 아직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000명을 내가 남겨두었다.” 이 말씀을 들은 엘리야는 크게 놀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나만 남은 줄 알았는데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0000명이 있었다니!” 

 

여러분, 이 말씀이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인줄 믿습니다. 부흥의 시대에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쉽게 눈에 띕니다. 반면 영적 기근의 시대에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잘 눈에 띄지 않아요. 하지만 구석구석 흩어져 은밀한 가운데 활동하고 있습니다. 

 

꼭 역사학자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한국교회 상황을 보면 소멸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젊은이들은 기독교를 완전히 버리고 탈 기독교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보배로운 존재들입니다. 

 

부흥의 시대에는 그냥 분위기를 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어요. 내 또래 청년들이 다 그렇게 신앙으로 사니까, 나도 별고민없이 따라서 합니다. 과거 우리가 대학생들 장막생활이라고 모여서 공동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장막생활하면서 매일 새벽기도하고 저녁에 기도모임하고 신앙적인 상담 서로 해주고, 기도해주고. 얼마나 즐거운 시절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때가 좋았죠. 이에 비해 영적 기근의 시대에는 믿음으로 사는 것에 훨씬 더 많은 도전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러 어려움이 있는데 외로움이 있습니다. 나혼자 이렇게 특별하게 사는 것이 자의식이 들고 외로워요.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믿음으로 사는 청년들을 하나님은 보배롭게 보십니다. 우리 종로7부 청년팀이 이러한 보배로운 남은 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7-10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새한글 성경을 보겠습니다: “7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은 애써 찾던 것, 그것을 얻지 못했지만, 선택받은 사람들은 얻었습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마음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8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는 대로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은 깊은 잠의 영과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입니다. 오늘날까지 그렇습니다.” 9또 다윗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밥상이 그들에게 올가미와 덫과 걸림돌과 앙갚음이 되게 해 주십시오. 10그들의 눈은 어두워져 보지 못하게 해 주시고 그들의 등은 늘 굽어 있게 해 주십시오.””

 

아합과 이세벨 시대 때 하나님은 7천명을 남겨두셨다고 했습니다. 자, 그러면 그 7천명 외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또 바울 시대 때 하나님은 바울을 비롯한 (정확한 숫자는 아니더라도 상징적 의미에서) 7천명을 남겨두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엘리야 시대 때, 또 바울 시대 때 복음을 영접하지 않은, 숫자로는 7천명과 비교할 수 없는, 그 수많은 다른 유대인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바울은 여기에 대해 놀라운 말을 합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바울 시대 때 복음을 영접하지 않은 그들이 자기가 마음이 완악해서 믿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믿기 싫어서 안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그런데 8절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깊은 잠의 영과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또 10절은 다윗이 자기 원수에 대해 기도하던 내용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눈이 어두워져 보지 못하게 되고 그들의 등이 늘 굽어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전에 제가 도로에서 등이 완전히 기역자로 굽은 한 할머니가 폐지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등이 그렇게 굽어있기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위를 보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죠. 그렇게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를 가는데 너무 위험해 보였습니다. 보니까 차들이 알아서 할머니를 피해 갔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등이 굽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내가 만약 영적으로 등이 굽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영적으로 등이 굽은 사람은 자기 눈앞을 보지 못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다가 어떻게 될 것인지 예측을 못해요. 하늘 일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영적으로 등이 굽은 사람은 자기 발 밑의 땅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 등을 누가 굽게 했다고요? 하나님께서 굽게 하셨어요. 충격적인 사실 아닙니까? 또 있습니다. 

 

또 깊은 잠을 자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예전에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밤에 자고 있는데 짖궂은 친구들이 장난을 쳤어요. 무슨 장난을 쳤냐면 그당시 학교 운동복을 입고 자고 있었는데 운동복 바지를 벗기고 치약을 잔뜩 발라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매직으로 얼굴에 낙서를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너무 열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넓은 방에 수십명의 친구들이 자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사실상 살아있지만 시체와 같아요. 불이 나도, 조금 있으면 타 죽어도 몰라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요. 잠자고 있으니까, 꿈꾸고 있으니까 자기 꿈속에서 복권에 당첨되었는지 히죽히죽 웃으면서 좋아하는데 현실은 불이 났습니다. 조금 있으면 죽게 되었어요. 여러분, 영적으로 잠든 사람의 형편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잠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는 사는게 재미있어요. 복권에 당첨되고 하는 일이 다 잘 되고. 그런데 사실은 현실을 떠나서 꿈속을 사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잠들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잠드는 영을 보내셔서 자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해하기 참 어려운 말씀이 몇 군데 있는데 이 본문이 그중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서 복음을 영접하고 다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실 것 같아요. 실제 그런 말씀도 있잖아요. 그러실 것 같은데 이 본문을 보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잠들게 하시고 영적인 곱추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새한글성경을 보겠습니다: “11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걸려서 비틀거리다가 아주 넘어지고 말았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걸려 넘어진 까닭에 구원이 다른 민족들에게 이르렀고,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질투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2그들의 걸려 넘어짐이 세상을 부유하게 했고, 그들의 실패가 다른 민족들을 부유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돌아와 그 수가 다 찰 때는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이 말씀은 위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작년 사도행전 말씀 때 선명하게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후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이 임하심으로 초대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한번에 3천명이 회개했습니다. 그 식솔들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수만명대의 큰 교회로 추정됩니다. 오늘날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수만명 대가 모였다면 굉장한 대형교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렇게 부흥하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시기심이 불타올랐습니다. 자기들은 안식일날 예배드릴 때 바리새인이 말씀전하면 그 시간은 잠자는 시간이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난 후 얼굴에 은혜가 하나도 없고 딱딱했어요.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예배를 마치면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고 찬양과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시기심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고 그것을 시작으로 엄청난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온 유대와 사마리와 오늘날 튀르키에 남부 안디옥까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우리 종로7부가 13가정이 있습니다. 가정 교회로 흩어지면 13개의 교회가 됩니다. 수만명이 모였던 예루살렘 교회가 가정교회 단위로 찢어진다면 얼마나 많은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 가정교회가 온 천지에 흩어져 복음을 전했고 그 가정교회를 통해 수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그러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이 우리가 지난 봄학기 사도행전을 말씀의 내용이 되겠습니다.

 

자, 우리는 여기에서 놀라운 비밀을 깨닫습니다. 두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영적인 잠을 자는 것은 소수의 선택받은 신자들의 신앙을 연단하고 성장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엘리야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 나오잖아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엘리야 한 사람만 남고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떠난 것 같은 그러한 영적인 어려운 시대에 엘리야가 까마귀가 배달해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면서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과부의 집에 빌붙어 살면서 얼마나 미안한 일입니까? 그런데 자의식을 극복하고 과부에게 떡과 기름을 대접받으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홀홀단신으로 아합에게 도전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의 믿음이 그렇게 성장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지금 특히 청년들 가운데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이 택하신 100명 중 3명, 많아야 5명을 엘리야의 수준으로 하나님께서 끌어올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3명에게 하나님이 가진 모든 자원과 그 능력을 그 3명에게 집중해서, 그 3명을 키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자, 어떻게 보면 이해가 안되요. 그럼 97명은 희생당한건가? 희생당한 것 맞습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사는 날이 얼마남지 않은 한 장인이 있었습니다. 그 장인에게 많은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인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장인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수많은 제자들 중에 한 명, 많아야 두 명을 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수의 제자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시간을 다 투자해서 모든 것을 전수할 것입니다. 꼭 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그러한 비슷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거죠. 

 

여러분, 지금은 영적 기근의 시대입니다. 영적 기근의 시대에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어떻게 일하신다고요? 97명이 잠을 자고 있을 때 깨어있는 세 사람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이 가진 모든 열정과 자원을 그 세 사람을 키우시고 훈련하셔서 엘리야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하십니다. 이 비밀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두 번째, 97명은 하나님이 포기하신 것인가? 이마에 ‘지옥’이라고 쓰신 후 뻥 차버리시는 것인가? 아닙니다. 그 97명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 97명은 그 세명의 엘리야를 통해서 마음에 시기심이 생기도록 하십니다. 

 

여러분,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안일어나요. 포클레인으로 콕 집어서 예배당에 던져놓아도 여기와서 또 잡니다. 올 때마다 10만원씩 주겠다 하면 올 수는 있겠죠. 그런데 와서 또 잡니다. 안돼요, 안돼. 그런데 그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청년을 깨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마음에 시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 단지 외적인 활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평생 사람을 대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데 저의 안목으로 볼 때 - 백요한 2세 목자님이 최근 1,2년 사이에 굉장한 영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절대 싱얼롱을 열심히 하는 등 외적인 활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보니까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어요. 그리고 정말 그 나이 또래 청년 가운데 이렇게 귀한 청년이 있다는 것이 저는 자랑스럽니다. 그 정도로 은혜가 있어요. 그런데 저는 은혜를 받았는데 옆에 있는 다른 2세들은 은혜를 받았거나 시기심을 느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요한 목자님이 믿음으로 죽 성장해서 30대가 되면 얼마나 성장하겠습니까. 그러면 그 비슷한 동료들의 마음에 언젠가는 시기심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옛날 어렸을 때는 나와 수준이 비슷했는데 30대가 되면서 나와 차원이 다른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보면서 시기심이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요한이가 저렇게 되었으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영적으로 잠든 사람에게 설교하고 온갖 방법을 써도 안됩니다. 그 마음에 시기심이 발동될 때, 그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종로 7부 청년팀이 주위에 있는 청년들의 마음에 시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귀한 주의 청년들, 주님의 택함을 받은 100명중의 3명, 남은 7천명 중 하나가 되는 그러한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13-24절은 접붙임의 비유를 통해서 칭찬받았다고 교만해지면 안된다는 경고입니다. 돌감람나무 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히면 어떻게 됩니까? 참감람나무 뿌리로부터 진액을 공급받아 참감람나무와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흔히 개신교와 유대교는 별개이거나 혹은 개신교가 유대교보다 더 우월하다는 그러한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개신교는 유대교와 별개이거나 혹은 유대교보다 더 차원높은 종교라면 유대교가 중심인 구약성경을 버리거나 가치를 낮은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돌 감람나무인데 참 감람나무인 유대교에 접붙힘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주신 약속의 성취요,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강조하는 포인트는 자랑하는 마음,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29-3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새한글성경을 보겠습니다: “29하나님의 은혜의 선물과 부르심은 취소될 수 없는 것이니까요. 30여러분은, 한때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순종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31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자비를 입은 탓에 이들도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 자신도 이제 하나님의 자비를 입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32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다 같이 불순종에 가두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고 말입니다.” 

 

지난 주 제가 당첨받은 임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지하 창고 열쇠를 받게 되었는데 임대 아파트 주민도 지하 창고를 주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준다는 거예요.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지하 창고 열쇠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입주 허가증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앞에 선 사람을 보니까 노란 종이에 무슨 도장도 찍혀 있는 입주 허가증을 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다른 창구로 가서 나도 달라고 하니까 임대 아파트 주민은 무슨 다른 종이로 대체한다는 것입니다. 알겠다고 하고 다시 줄서는 데로 돌아왔는데 와보니까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아까 내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컴플레인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컴플레이냐면, 왜 내 창고가 내 집에서 이렇게 머냐 하면서 컴플레인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입주 허가증을 받아야 하는 줄 알고 다른 창구에서 문의하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돌아왔는데 아직도 컴플레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용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내 집 바로 곁에 창고가 있어야지 왜 건너편에 창고가 있고 건너편 사는 사람은 내 집 근처에 창고가 있는가 하는 컴플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그 걸어가는 거리가 1분도 안되요. 그런데 그 거리가 멀다고 컴플레인을 하는데 그 열쇠배분하는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정한 것도 아니고 “네 알겠습니다 담당하시는 분에게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답변을 했는데 같은 내용의 컴플레인을 모자가 열을 내면서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니까 열쇠 나눠주시는 분이 컴플레인이 다 끝날 때까지 같은 내용을 참고 계속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저는 이 임대 아파트가 전혀 내 수고와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는 은혜 의식이 있었어요. 당첨된 것이니까. 더 넓게 보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모든 것이 황송하고 그저 감사하고 열쇠 나눠주시는 분에게 내가 먼저 가서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고 감사합니다 말하고, 또 사무실에서 나올 때 인터넷 하라고 광고하시는 분이 다가와서 광고지를 나눠주며 인사하니까 나도 고개를 숙이고 감사합니다 인사했습니다. 하여간 모든 것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내가 내 돈으로 입주한 것이라는 권리의식이 있구나 -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런 주장을 할 수 있겠죠. - 다만 조금만 불편해도 그것이 크게 불편하게 느껴지고 그것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을 보고 어떤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렇구나 우리도 신앙적으로 마찬가지일 수 있겠다, 하나님께 대해 우리가 이러한 권리의식을 가질 수 있겠다. 내가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는데, 하나님, 잊어먹으셨어요? 그런데 지금 나를 이렇게 대우하신다고요?’ 이것이 심해지면 하나님께 불평을 넘어 삿대질 할 수도 있겠다.’ -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기억해보니 유대인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33-36절은 찬양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33오, 그지없이 깊도다, 하나님의 부유하심과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의 판결은 가늠할 수 없고, 하나님의 길은 헤아릴 길 없구나! 34“누가 주님의 생각을 알았는가? 누가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되었는가? 35누가 주님께 먼저 드려서 되돌려받겠는가?” 36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나서, 하나님을 통해서 지탱되며,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토록 있기를! 아멘!”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결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일꾼이 필요해서 일꾼에게 일을 시키고 임금을 주는 그런 사장님같은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손이 부족해서, 내 일을 할 일꾼이 필요한데 내 일을 좀 해줘 이렇게 평생을 등골이 휘도록 일을 시켜먹고 나중에 임금을 주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다 주실 수 있고, 또 주시고, 또 어떤 일손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지난 주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나왔던 것처럼 5시에 와서 1시간 일한 품꾼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하나님은 그 포도원 주인처럼 보람된 일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을 하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인생을 헛된 일에 허비하지 않도록, 의미있고 가치있고 뭔가 배우는 것이 있는 일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과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관계성을 맺고자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받기 원하세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돈이 부족해서 여러분에게 헌금을 받기 원하시겠습니까, 일손이 부족해서 일꾼을 필요로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으로부터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받기 원하십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의 마음에 아까 아파트 입주민같은 지나친 주인의식, 공로의식이 조금이라도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그러한 주인의식, 공로의식이 있으면 있는만큼 그와 반비례해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과 영광돌리는 마음은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같이 갈 수 없어요. 공로의식이 충만한데 하나님을 향한 감사하는 마음도 충만하다 - 안됩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왜 엘리야의 시대 때, 또 사도 바울 시대 때,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잠자는 영을 보내주셨는지 아시겠죠. 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은혜를 주시는지 아시겠죠. 모든 사람에게 잘못된 주인의식, 공로의식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저희가 이러한 공로의식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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