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부활절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고전 15장) - 백요셉
2025.04.20 15:22
2025 부활절 메시지 (백요셉)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말씀/ 고린도전서 15:1-58
요절/ 고린도전서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사람들은 피곤하면 피곤해 죽겠다. 힘들면 힘들어 죽겠다. 산에 오르면 숨막혀 죽겠다. 심지어 웃기면 웃겨서 죽겠고 행복하면 행복해 죽겠다라고 합니다. 그만큼 죽음은 항상 가까이 있는데 우리는 다만 그 죽음을 일부러 잊고 영원히 살것처럼 오늘을 살아 갑니다. 신자들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프지 않고 장수하며 평안하게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와 세상사람 들을 확연히 구별해 주는 관점의 차이 하나 있습니다. 신자들은 죽은후 행복한 천국을 꿈꾸고 세상 사람들은 이땅 현재에 집착합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장 말씀을 통해 우리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덧입고 구원과 영생이 보장된 삶을 살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 1장 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님(1-34)
고린도교회는 사도바울이 1년 반을 머물며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곳입니다. (첨부사진1) 바울 당시 고린도는 그리스의 상업 중심지이며 동서 문화가 교차하는 국제적인 항구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제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 머물면서 고린도전서를 집필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그의 편지 내용은 신자들의 문제에 대한 실질적이고 신앙적 관점에서 대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만 고린도교회는 바울파와 아볼로파 등 분파문제, 교회 내의 음란 문제, 뿌리깊은 헬레니즘 문화로 인한 우상문제들로 시끄러웠습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이 상기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바울은 먼저 자신이 전한 복음을 그들이 받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탕으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사실을 상기(Remind) 시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 들은 부활에 대한 완전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나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의 문제가 뿌리깊은 기복주의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은 안믿는 우리 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정된 죽음의 종착지로 한없이 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차역에 가보면 열차의 도착 예정 시간이 표시되지만, 이 죽음의 열차는 정해진 순서나 예고가 없이 다가오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앞에서 사형일을 기다리는 사형수와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뇌가 만든 망각이 그 두려움이 죽음을 잊어버리고 살게 하지만 우리 의식의 가장 끝자락에는 죽음의 공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무늬만 크리스챤이고 실제로는 믿음이 없는 명목상의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를 교제나 인맥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세속적인 교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 하는 사람들은 돈을 잘 벌고 좋은 기업에 취업하고 초고층 아파트에 사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명성있는 교수가 되고, 유명 학원 강사가 되고, 백만 유튜버나, 갓생(God生)하는 인생이 된다고 해도 죽음을 피할수 없습니다. 죽음뒤 그가 돈으로 살수 있는 것은 자신을 담을 관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위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간절히 믿을 때 구원이 보장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고대 문서의 역사적 기록은 사실로 믿지만 최고 오래된 역사서라 할수 있는 성경에 기록된 부활의 기록은 의도적으로 의심하고 불신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의 역사적 기록 대로, 부활을 목격한 수많은 증인들로 그리고 성도들을 탄압하던 바울 자신의 회심과 간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셨음을 증명합니다. 불교의 석가나 이슬람의 마호메트와 같은 종교들은 특정 지역에 그들의 무덤이 존재합니다. 무덤은 그들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텅비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빈무덤과 죽음이 두려워 숨어 있던 겁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순교함으로 그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이 부활을 목격한 수많은 제자들과 많은 선교사들의 죽음을 무릅쓴 희생적 삶으로 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전파되고 확증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고린도 교인들은 부활을 잘 받아 들이지 못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린도 성도들은 부활이 있다는 것을 관념적으로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육체가 다시 부활한다는 몸의 부활은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너무나 연약하고 죄악되고 정욕된 것인데 어떻게 부활한다는 것이냐며 반문합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 내부 인트라넷에 직원들 이름마다 사진이 있는데 회사에서 최근 사진으로 교체하라고 그렇게 지시를 내려도 옛날 젊었을 때의 사진을 그대로 올리고 있는 직원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 목자님들도 우리의 가장 왕성했던 청년기를 가장 그리워할 것입니다. (첨부자료2)
그만큼 예전 팔팔하고 왕성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겠죠. 아무리 몸짱, 얼짱이라 해도 이 모든 것은 세월 앞에서 그 힘을 잃어 버립니다. 그럼 부활시에 어린 나이에 죽은 자는 연약한 어린 아이의 몸으로, 젊어서 죽은 자는 병든 몸으로, 나이 들어서 죽은 자는 나 썩어 문들어진 몸으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까? 이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헌신함으로 살았는데 늙고 썩어 문들어진 육체로 다시 부활 한다면 그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그런 육체로 다시 부활한다면 세상 사람들과 같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교인 들이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활의 몸은 죽음을 초월한 기존의 육체와는 차원이 다른 부활체입니다.
여러분에게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부활과 그 재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세가지 중 몇 개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랜 시간동안 민음 생활을 했지만 내가 제대로 믿는지 의문이 가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믿는다고 해서 내가 교회에서 오래동안 신앙 생활해서 혹시나 믿는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시간 이런 사실들을 머리로는 믿지만 마음으로 믿지 못하다면 스스로 약해진 믿음을 다시 점검하고 간절히 주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릴때 저는 꿈을 꿀때면 돈이 한없이 쏟아져 나오는 땅을 파헤치는 꿈을 꾸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어나면 매번 학교 문제집 하나 제대로 살수 없는 가난한 집안 환경과 마주쳐야 했습니다. 남자만 일곱인 칠형제 중 다섯째인 저는 돈이 없어 대학에 가는 것은 꿈조차 사치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밥을 먹어도 전투적 이였고 맛있는 것을 조금 더 많이 먹기 위해 서로의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가 저의 대학 진학을 위해 소와 남아있는 집의 전답을 파신 부모님의 도움으로 외대 베트남어과에 극적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난한 집안환경과 부모님께 금전적 부담을 주었다는 죄의식, 상대적으로 부유한 친구들에 대한 비교의식, 도무지 경상도 억양으로 발음하기 어려운 전공 베트남어에 대한 열등감은 저를 병들게 하였습니다. 급기야는 학교 가는 것이 무섭고 교수님이 베트남어로 한번 읽어 보라는 말이 무서워 강의실 맨뒤에 보이지 않는 듯 투명 인간으로 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강의는 빼먹는 날이 많아 졌고 밥 사먹을 돈이 없어 굶으면서 대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가난한 환경을 탓하고 무기력한 자신을 한탄하며 중풍병자 같은 신입생 시절을 보냈습니다. 휴학과 함께 군 제대후, 그래도 나는 할수 있다라는 군인정신으로 전공도 열심히 하고 신문사에서 숙식을 하며 아침에는 알바를 하며 등록금도 벌며 참 열심히도 살았습니다. 쉼없이 열심히 졸업하기 위해 달리고 있는데 왜 달려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4학년 2학기 진로문제와 앞으로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절망하는 가운데 UBF 동아리 문을 열고 그동안 잊고 왔던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신입생 초기 UBF 목자님을 통해 성경을 처음 알았던 때와는 달리 말씀은 저의 마음에 큰 기쁨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볼수록 저의 마음에 위로가 되었고 그 기쁨이 쌓여 저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저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주님의 은혜를 영접함으로 무기력하고 열등 했던 제가 주님의 강한 군사로 훈련되고 단련되어 갔습니다. 저는 험악한 세상 가운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였지만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직장을 감당하며 한집안의 가장으로서 외대 목자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늘 주눅 들어 눈치보고 말조차 어눌해 부끄러워 하던 제가 당당하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고 직장에서도 당당하게 일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28년 동안 직장 가운데서 저를 보호 하시고 세번이나 회사가 망할 위기 가운데에서도 상사의 괴롭힘 속에서도 잘리지 않고 직장을 통해 물질적으로 자립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태풍 앞에 촛불같은 저를 세우시사 영원히 주님안에 당당하게 빛나는 태양같은 자로 키워 주셨습니다. 우리는 혼자는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큰산도 큰배도 넘길수 있는 큰 파도요 태풍과 같은 하나님의 군사들이 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자신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하는 주위 사람들 모두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제 2장 그리스도로 인한 부활의 영광된 모습(35-58)
그럼 부활 때에 믿고 죽은 자들은 어떤 몸으로 변화됩니까? 35절부터 바울은 신자들의 몸의 부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42-44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부활의 몸은 각기 다른 육체, 서로 다른 형체와 영광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바울은 사람의 부활을 씨가 썩는 과정으로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씨는 반드시 썩고 죽어야 변화됩니다. 이 싹을 튀우기 위한 씨의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새롭고 아름다운 존재로 변화 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부활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을 본래 몸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영과 몸을 가진 유일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부활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활의 몸은 기존의 몸의 형체를 어느정도 가지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완전한 다른 부활체입니다. 도마에게 보이실 때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의 상처를 간직한 인간의 몸을 직접 보여주셨고 닫혀진 문을 뚫고 숨어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천사와 같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부활체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활의 몸은 베드로전서 1:4절과 같이(썩지 아니하고 더럽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산을 너희에게 물려주셨느니라) 썩지도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강하고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45,46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생기를 받아 살아있는 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죽은 후 부활하심으로 살려주는 영(a life-giving spirit)이 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고 흙에 속한 자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완전한 인간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첫사람 아담이 불완전한 생명의 조상이 되었던 것과 달리 예수님은 완전한 생명을 주는 구원자가 되셔서 우리들을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하셨습니다.
50절에서 5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 되리라”
혈과 육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어 받을 수 없습니다. 혈과 육은 우리의 현재의 몸을 상징합니다. 또한 썩는 몸은 썩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 몸이 하나님 나라에서 살려면 이에 합당한 몸으로 반드시 변화되어야 합니다.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나팔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이며 동시에 세상 심판의 날입니다. 이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잠자던 자들이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게 됩니다. ‘순식간’이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짧은 시간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것이 눈 깜짝할 순간에 일어날 것을 말해 줍니다.
55절에서 57절을 보십시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 최후의 날에는 우리의 이 썩을 몸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게 됩니다. 이 죽을 몸이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입게 됩니다. 이때는 신자들에게는 생애최고의 날이며 최후의 승리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죽음과 죄에 대해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날은 사망이 사망선고를 받고 완전히 패배한 날입니다. 사망이 ‘사망선고 받은날’ 이 날이 바로 예수님 부활의 날입니다. 죄와 율법의 권능이 상실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한 완전한 승리의 날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그날 우리는 부활의 몸을 덧입고 영원히 승리의 찬가를 부를 것입니다.
55절을 다함께 다시 한번 외쳐 봅시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러면 부활을 소망하는 우리 신자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5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부활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일에 더욱 힘쓰게 합니다. 우리에게 부활신앙이 있다면 세상 가운데 전혀 흔들림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있다면 삶의 십자가와 모든 수고들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삶이 주는 버거움도 사라지고 세상에 대한 욕심도 집착도 내려놓고 하루 하루를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살수 있습니다. 웃음기 없는 우리의 얼굴이 밝은 태양처럼 빛나고 기쁨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이시간 우리가 부활신앙을 다시 한번 덧입고 세상에 대한 근심과 욕심을 버리고 견실하며 흔들리지 않으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날마다 죽노라 외치는 사도바울과 달리 나는 회사에 날마다 죽으로 가노라 푸념하기를 잘하였습니다. 이 말을 목자님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였습니다. 예전에 제가 동역자에게 이렇게 제가 얘기하면 동역자가 좀더 저에게 신경을 써주고 머리를 주물러 주었는데 요즘에는 손하나 까닦하지 않으니 저는 이런 넋두리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 두자녀 요한이와 한나를 보며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적이지 못하지 않는가라며 걱정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또 그동안 수고했으니 이제는 좀 쉬자라는 안일한 생각이 들고 유투버의 정글 속에 빠져 있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안일 속에 거할 때 주님께서는 부활 메세지를 작년과 올해 연달아 전하게 하심으로 그 말씀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하십니다. 제가 예수님의 부활 신앙을 회복하고 때때로 들어오는 불신과 나태함을 이겨내고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주안에서 하는 우리의 수고는 헛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말씀 안에 꾸준히 거하고 겸손히 주님을 영접하면 할수록 우리의 믿음은 점점 자라게 됩니다. 죽음의 세력에 맞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부활의 실제적인 믿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믿음이 정말 나의 실제 삶을 지배하고 확신이 될 때, 우리는 부활의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승리를 주신 부활하신 주님을 늘 바라보며 부활신앙 위에 굳게 서서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