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창세기 8강 "바벨탑" (창 10,11장)
2026.06.29 08:01
2026 창세기 8강
바벨탑
말씀/ 창세기 10,11장
요절/ 창세기 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바벨탑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인간의 교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은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사실은 우리의 삶 가운데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바벨탑들이 있는지 발견하고 바벨탑을 제거하는 복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세 아들인 셈과 함, 야벳을 통해 온 땅에 민족과 나라들이 퍼져나가는 장면입니다. 2-5절은 야벳의 후손입니다. 그들은 유럽과 중앙 아시아 등 북방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바닷가 땅과 여러 섬에 거주하였습니다. 6-20절은 함의 후손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등 주로 남쪽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21-31절은 셈의 후손입니다. 그들은 오늘날 이라크 땅인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중동 지방의 중심부에 정착했습니다.
이 계보에서 핵심이 되는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힘센 사냥꾼의 등장입니다. 10:8,9절을 보십시오. 8에티오피아는 니므롯을 낳았다. 니므롯은 땅에서 처음으로, 힘으로 다스리는 사람이 되었다. 9그는 여호와 앞에서 힘센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니므롯처럼 여호와 앞에서 힘센 사냥꾼’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함의 후손 가운데 니므롯이라는 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땅에서 처음으로 힘으로 다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전까지는 무엇이 세상을 다스렸을까요? 그 전까지는 어떤 윤리와 도덕, 더 나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우리 옛말에 “하늘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 나라도 과거 통치자들이 그래도 하늘 무서운 줄 알았습니다.
얼마 전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계유정난’ 사건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아들이었던 수양대군은 왕이 되기 위해 어린 조카이자 당시 왕이었던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 황보인, 또 왕편에 섰던 신하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연려실기술이라는 한 야사의 기록에 의하면 어느날 세조는 잠을 자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습니다. 꿈 속에서 단종의 친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이 나타나 세조에게 침을 뱉고 사라졌습니다. 이후 세조의 온몸에는 피고름이 나고 극심한 가려움과 통증을 동반하는 악성 피부병이 생겼습니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온천을 찾아다니고 불교에 의존했으나 완치하지 못했습니다. 또 조선왕조 실록에 의하면 세조가 왕이 된지 3년 되던 해 가장 아끼던 장남 의경 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또 그의 차남인 예종이 왕위 즉위 2년 째 되던 해 역시 20세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이런 역사의 기록들을 통해 조선 시대 왕들은 최소한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니므롯 이전에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하늘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두려움을 최초로 떨쳐버리고 일어선 사람이 누구였다고요? 니므롯입니다. “나는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늘의 통치자? 그런 건 나 모른다. 나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 인류 최초로 그런 두려움을 떨쳐버렸습니다. 뭐든지 최초로 하는 사람을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영웅’이라고 합니다. 콜롬버스의 유명한 일화 있잖아요. 그가 한 것이 별거 아니다 폄훼하는 사람에게 콜롬버스가 말했죠. “뭐든지 최초로 하는 것이 위대한 것이다.”
9절을 보면 “그는 여호와 앞에서 힘센 사냥꾼”이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라는 의미는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같은 “신적 재능과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뭐든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그러한 담대함과 용기를 가진 그런 영웅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힘센 사냥꾼이라는 것은 호랑이나 사자를 때려잡았다는 뜻이 아니고, 무지비한 군대의 힘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여러 나라를 정복하는 정복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수많은 민족의 피를 흘리고 대륙을 정복했던 몽골의 징기스칸같은 무자비한 정복자였던 것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10니므롯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빌론, 에렉, 아카드, 갈네에서 시작했다. 11니므롯은 그 땅에서 아시리아로 나아가서 니네베, 르호보딜, 갈라흐를 세웠다.
니므롯이 세운 나라는 시날 땅의 바빌론, 에렉, 아카드, 갈네, 더 나아가 아시리아의 니네베, 르호보딜, 갈라흐였습니다. 뒤의 11장에서 바로 이 바빌론의 시날 땅에서 바벨탑 사건이 발생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대 아카드 제국, 아시리아 제국, 바벨론 제국, 더 나아가 로마 제국, 또 오늘날 제국주의의 모델과 사상의 틀을 건설한 사람이 바로 이 니므롯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거예요. 다 노아의 후손이잖아요. 따지고 보면 다 우리의 형제고 자매잖아요. 옆 마을의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족보를 따져 거슬러 올라가보면 다 우리 피붙이고 친척인 옆 마을사람들이 뭔가 거기에서 황금이 나왔다, 뭔가 좋은 것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거기 가서 그 사람들 다 때려죽이고 황금을 차지하자 - 그런 생각 안 하잖아요. 다 우리 피붙이인데 그런 생각 안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니므롯이 최초로 그런 생각을 다 뒤집어 버리고, 그런 케케묵은 생각에 난 매이지 않는다 하면서 칼과 망치를 들고 가서 다 때려죽이고 내 것으로 만드는, 그런 일을 최초로 한 사람이 바로 니므롯이라는 것입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24아르박삿은 셀라흐를 낳았다. 셀라흐는 에벨을 낳았다. 25에벨에게는 두 아들이 태어났다. 그 하나의 이름은 벨렉이다. 그때에 땅이 쪼개졌기 때문이었다. 또 그의 형제의 이름은 욕단이다.
24,25절은 셈의 후손의 계보입니다. 계보 중 에벨이라는 사람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하나의 이름은 벨렉이었습니다. 벨렉이란 “쪼개졌다”는 뜻입니다. 쪼개졌다는 것은 진짜로 땅이 쪼개졌다는 것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벨렉의 때에 하나님을 떠나고 신앙을 버리는 큰 신앙적 반역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이죠.
11장은 그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일으킨 한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1온 땅에서 쓰는 말이 같았고, 쓰는 낱말들도 같았다. 2사람들이 동쪽에서 옮겨 올 때 일어난 일이다. 그들은 시날 땅에서 평지를 찾아 거기에서 살았다. 3사람들이 서로 말했다. “자, 벽돌을 빚고 구워서 단단히 만들자.”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진흙 대신 역청을 썼다. 4또 말했다. “자, 도시를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탑을 세우자. 그래서 우리의 이름을 떨치자. 그러면 우리가 온 땅 표면 위로 흩어지지 않아도 될 거야.”
당시에는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쓰는 말이 같았고, 쓰는 낱말들도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동쪽으로 옮겨가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시날 땅에서 평지를 찾았습니다. 시날 땅은 여기 지도에 나오는 것처럼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위치한 곳입니다. 고대 수메르 문명이 바로 이곳에서 발전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배우겠지만 아브람은 이곳 수메르 문명지에서 최첨단 생활을 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수메르 문명권 사람들은 도서관도 만들고 맥주도 만들어서 마셨다고 해요. 굉장히 문명이 발전했습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이 수메르 문명지역에서 혁명적인 기술이 발전했습니다. 돌과 진흙대신에 벽돌과 역청으로 건물을 만드는 그러한 기술이 개발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치면 AI 기술이 개발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기술이 처음 나왔을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다시 한번 4절을 보십시오. 4또 말했다. “자, 도시를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탑을 세우자. 그래서 우리의 이름을 떨치자. 그러면 우리가 온 땅 표면 위로 흩어지지 않아도 될 거야.”
여기 그림을 보면, 오늘날은 이렇게 할 필요가 없죠. 오늘날은 건축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에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이렇게 넓은 터를 잡을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당시 건축 기술로는 하늘에 닿을만한 놓은 탑을 만들기 위해서는 굉장히 넓은 터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시날 평야가 적합하죠. 그래서 넓은 터를 잡고 벽돌로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그런 건물을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건물을 지은 목적이 뭐라고요? “우리의 이름을 떨치자.” 여러분,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의 제 일번 질문과 답변이 무엇입니까? 소요리 문답이 뭐냐면, 사실은 카톨릭에서 이런 것 굉장히 잘 해요. 카톨릭에서는 성당 처음 나오면 성경공부보다 교리문답 공부부터 시켜요. 처음 성당 나온 사람을 앉혀놓고 “당신은 왜 태어났습니까, 당신이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렇게 질문을 해요. 뻥 쪄서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당신이 이 시간 살아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톨릭은 이런 소요리 문답집이 책으로 다 되어 있어요. 그래서 내가 성경을 잘 몰라도 얼마든지 처음 교회에 오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요. 영어로 한번 볼까요?
* Question: What is the chief purpose of man?
* Answer: Man’s chief purpose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여기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우리가 태어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또 우리가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나의 삶을 지켜보고 “야, 정말 저 사람과 함께 하신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신 분이다. 저 사람을 저렇게 변화시켜서 쓰시는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시다.” 저도 이제 제가 죽고 세상을 떠난 다음에 저를 기억하는 자리에 사람들이 와서 “야, 정말 문엘리야 목자, 문경석 형제와 함께 하신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다.” 제가 최근에 제 둘째 아들을 통해서 자기 발견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다른 사람의 형편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고 내 편한대로 하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둘째 아들을 통해서 “내가 젊었을 때 저랬구나. 그래서 목자님들이 나한테 이기적이라고 했구나.” 굉장히 자기 발견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둘째 아들에게 굉장히 감사했습니다. 거울처럼 자기 발견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서 감사했어요. 아무튼 “이렇게 selfish하고 자기 중심적인 문경석 형제를 이렇게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종으로, 말씀의 종으로 쓰신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셔. 하나님을 정말 찬양합니다.” - 이런 인생을 산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런 인생이 될 것입니다. 아 그렇다고 제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을 살았다고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예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죠.
요즘 청년팀들 보면서 정말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립니다. 부쩍 지난 1년 사이에 우리 청년팀들이 제가 볼 때 영적으로 확 성장했어요. 우리 이바울 형제 작년 여름 수양회 때 매일 헬스를 해야 하기 때문에 헬스를 할 수 있으면 수양회 가고 할 수 없으면 못간다 그렇게 얘기했는데 지금 1년 사이에 정말 예배를 사모하고 주인 의식을 가지고 매주 예배를 나오는 신실한 주의 청년으로 성장하고 있어요. 제가 이바울 형제의 체면을 좀 깎았는지 모르겠지만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작년 여름 수양회 가운데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어요. 은혜를 주셨어요. 그래서 1년 사이에 이렇게 영적으로 성장하고 변화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이 바벨탑을 짓는 사람들은 뭐라고요, 이 탑 건설을 통해서 “우리의 이름을 떨치자. 우리의 이름을 높이자. 우리의 영광을 드러내자.” 우리의 이름을 높이자는 것이 그렇게 잘못한 것인가, 그렇게 정말 나쁜가 - 이런 생각이 들죠.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모두”가 아니예요. “우리 다 함께”가 아니예요. 여기에서 “우리”는 누굴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소수의 “우리”입니다.
역사 가운데 바벨탑 사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있는데 바로 ‘나치즘’입니다. 나치즘도 하나의 이념이지 않습니까? 나치즘의 핵심 사상은 게르만인이 최고 우월한 민족이다, 또 유대인은 멸절시켜야 한다, 또 개인보다 민족과 국가가 더 우위에 있다 - 이것이 세 가지 특징이거든요. 우리가 전쟁사를 연구하다보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히틀러의 행동 중 하나가 뭐였냐면 이차 대전이 한창일 때 소련을 침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사적으로 볼 때 가장 바보같은 짓이었습니다. 당시 절대로 소련을 침공하면 안되었습니다. 당시 참모들도 반대했다고 해요. “지금은 절대 그렇게 하면 안된다.” 그때 히틀러가 밀어부친게 뭐냐면 “이 소련 사람들은 슬라브족 아니냐, 슬라브족은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쯤 있는 그런 종족 아니냐, Untermenschen 아니냐. 그런데 우리 우수한 게르만인이 이 슬라브족을 쳐서 이길 수 없다고?” 하니까 참모들이 아무 말 못하는 거예요. 나치즘의 핵심이거든요. 그래서 그 사상대로 밀고가서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다 잘 알다시피 히틀러가 몰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입니다.
사진 한번 보겠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이 히틀러가 구상한 ‘게르마니아’입니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세계 제국의 수도로 탈바꿈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이름을 ‘게르마니아’로 명명하고 도심 중간에 보면 폭 120미터, 길이 7km의 도로를 건설하고 100만명이 운집할 수 있는 거대한 광장과 18만명을 수용하는 거대 돔을 건설하겠다, 그리고 모든 건물들을 한 개인의 자유와 인권보다 국가와 민족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도록 웅장하고 거대하게 - 사진에 나오는 이 건물들 옆에 서면 개인은 개미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죠. 그러한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히틀러의 생각이 바벨탑의 정신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떨치자” 했는데 그게 다같은 우리가 아니예요. 게르만인만 우리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국가 권력을 쥐고 있는 히틀러와 소수의 권력자들의 우리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나치즘은 사라졌기 때문에 바벨탑의 정신도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바벨탑의 정신이 남아 있어요. 내가 얼마나 더 다른 사람보다 잘났는가, 내가 얼마나 더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고 날씬하고 예쁘고 멋진 조건을 가졌는가 - 그것을 가지고 우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높입니다. 그리고 기껏해야 나의 가족들 - 내 남편이 얼마나 좋은 직장을 다니는가, 또 내 자녀가 얼마나 좋은 대학을 나왔고 좋은 환경 가운데 있는가 - 기껏해야 자기 주변의 가족들을 높여요. 그리고 속으로만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냅니다. 비교우위에 서 있는 자신과 비교해서 자신보다 밑에 있는 사람들을 은근히 깔봐요. 무시하는 말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를 높이는 거예요. 이게 바로 바벨탑의 정신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이러한 바벨탑의 정신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바벨탑의 정신으로 나를 은근히 무시하고 깔아뭉개고 짓밟는 사람 때문에 굉장히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자존감이 확확 떨어지는 것입니다. 심리학 이론에 이런 것이 있더라고요.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내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이 있는데, 상대방을 무시하고 깎아내림으로써 상대방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면서 그 순간 동시에 그가 깎아내려진 자존감만큼 뺏어서 먹는, 그래서 내 자존감을 높이는 그런 게 있다고 합니다. 바벨탑의 정신은 나를 높이고 동시에 더 이상 나를 높이기 어려우면 - 지면이 낮아지면 탑이 높아지잖아요 - 다른 사람을 확 깎아내려서 상대방의 자존감을 훔쳐서 먹는 이것이 바로 바벨탑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바벨탑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때 그 선악과를 따 먹은 정신이 뭐예요? “내가 이제 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사리분별력이 뛰어나게 되어서, 지혜가 생겨서 하나님 필요없이 충분히 나 혼자서 세상을 살 수 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은 정신입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없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어떤 그런 것 - 그것이 내 속의 지식이나 자산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내 밖의 무언가가 될 수 있지만 하여간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하나님을 대체하는 것이 바벨탑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바벨탑으로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이 있습니다. 물론 이제 바벨탑 시대 때 벽돌 자체가 죄는 아니잖아요. 그 기술 자체가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이와같이 오늘날 눈부신 과학 기술의 발전 자체가 절대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이용해서 바벨탑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오늘날 인공지능의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최대 수혜국이 대한민국이라고 말해요. 왜냐하면 인공지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 엄청나게 많은 양의 반도체가 필요하고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국이 대한민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도체는 원래 시류를 많이 타는, 팍 올랐다가 팍 꺾이는 - 그렇기 때문에 주가가 잘 안 올랐어요. 왜냐하면 주가는 미래를 보거든요. 미래 전망이 좋아야지 주가가 오르거든요. 지금 아무리 잘 나가도 미래가 조금 불안정하다 - 그러면 사람들이 투자 안 합니다. 그런데 AI 기술의 발전으로 지금 보니까 앞으로 최소한 수년간 반도체가 계속 필요하다, 미래가 정말 탄탄하다 - 그러니까 주가가 엄청나게 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가가 코스피 전체 지수를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지하철을 탔는데 흰머리가 지끗하고 연세드신 분이 휴대폰을 열심히 보시는 거예요. 안볼려다가 보이니까 봤는데 주식투자앱을 뚫어지고 보고 계셨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사람들은 나의 미래의 안정과 보장을 위해 교회에 가기보다 주식 시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제 사람들은 시편 23편을 다음과 같이 바꿔서 읽고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나의 목자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식 투자가 나를 평안한 침대에 누이시며
쉴만한 아파트로 인도하시는도다
오른 주가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나를 더 비싸고 좋은 아파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주가 폭락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파산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반드시 주가가 다시 오를 것이기 때문이라
AI 기술 발전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식 투자가 투자에 회의적이던 이들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고소득을 내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통장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주식이 나를 먹여 살리리니
내가 죽을 때까지 주식 투자하리로다.”
여러분, 주식 투자 자체가 절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자들마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일요일 아침, 주일 아침 말씀을 보기보다 먼저 주식창을 열어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보다 주식을 더 많이 생각하고 또 내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기보다 주식투자에 맡기려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상 숭배가 다른 게 아니예요. 꼭 무슨 목석 앞에서 절하고 그래야 우상숭배가 아니예요. 물론 그것도 우상숭배지만 바로 이렇게 주식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 보실 때 바벨탑 사건이요,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에 흠뻑빠진 사람은 상대방이 나말고 다른 여성에게, 다른 남성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표현할 때 질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어떤 것을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할 때, 뭐라고요? 질투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질투하실 때 뺨 한대 때리고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실 때 여러분이 믿고 의지하는 그 우상을 잘근잘근 밟아버리십니다. 가루가 될 때까지 부숴버리십니다.
제가 지금 볼 때 현재 대한민국 크리스천들이 주식을 우상숭배하는 죄로 점점 빠지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크리스천들은, 특히 종로7부 목자님들, 형제 자매님들은 주식 투자를 하더라도 우상숭배로 나아가지 않도록 주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5-9절을 보십시오. 5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이 세운 도시와 탑을 보러 내려오셨다. 6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같은 백성인 데다가 모두 같은 말을 쓰는군. 이들이 하기 시작한 것이 이 정도라니. 이제는 이들이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아무것도 말릴 수 없겠군. 7자,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말을 뒤엉키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8여호와께서 사람들을 거기서부터 온 땅 표면 위로 흩어 버리셨으므로, 사람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바벨이라고 지어 불렀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온 땅의 말을 뒤엉키게 하셨고, 거기서부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온 땅 표면 위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건설하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그들을 보신 하나님은 이들이 하는 일을 막아야겠다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신 방법이 무엇입니까? 여러 언어가 생겨서 그들이 서로 대화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작업을 하는데 위에서
“뭐라고?”
“아, 쏼라쏼라”
“아 뭐라고?”
“아, 쏼라쏼라쾅”
도저히 작업을 할 수 없는 거예요. 결국은 포기하고 여기저기로 흩어졌습니다.
10-26절은 셈의 계보입니다. 셈의 계보는 온 세상이 하나님을 떠나는 중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7-32절은 셈의 계보 중에서도 데라의 계보입니다. 벨렉의 때에 온 세상이 둘로 쪼개진 후 셈의 계보, 그 중에서도 데라의 계보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계승되었습니다.
여호수아 24:2절을 보면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오늘날 이라크 땅인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전승에는, 제가 찾아보니까 여러 버전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데라는 우상 제작자이자 숭배자였습니다. 어느날은 아들인 아브람에게 가게를 맡기고 외출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외출한 틈을 타서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그 우상을 제일 큰 우상을 제외한 나머지 우상을 아브람이 망치로 다 깨부숴 버렸습니다. 나중에 집에 돌아온 데라가 이 우상 하나에 50만원, 100만원인데 크게 화를 내면서 어떻게 된건지, 네가 한 것 아니냐 물었습니다. 이때 아브람이 “아버지, 여기 있는 가장 큰 우상이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려다가 서로 싸움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이 제일 큰 우상이 다른 우상을 다 깨부숴 버렸습니다.” 그러자 데라가 “말이 되느냐? 돌로 만들어져서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발이 있어도 걸을 수 없는 이 우상이 어떻게 서로 싸울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 어떻게 서로 깨부술 수 있단 말이냐, 이게 말이 되냐?” 그때 아브람이 “아버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움직이지 못하는 이 돌덩어리를 왜 신으로 여기고 섬기십니까”
이것은 유대인 전승에 내려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24:2절에 보면 분명히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면서 다른 신을 섬겼다 -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노아 시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떠나서 반으로 쪼개졌다가 그 다음에 점점 더 하나님을 떠나서 데라의 계보만 겨우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그 데라마저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살아야지 하면서 우상을 만들어서 제작하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우상을 제작하는 그러한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은 이제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또다시 방주를 만드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음 주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바벨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선물로 주신 그 힘과 능력, 그 아름다운 재능을 이용해서 하나님 대신 나를 높이고 주의 일을 하고 이웃을 섬기는 대신에 나의 유익을 도모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바벨탑을 쌓는 삶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 대신에 내가 믿고 의지하는 그 모든 것 - 그것이 바로 바벨탑인 것입니다. 우리 종로7부 모든 분들이 바벨탑을 쌓는 인생 대신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 하나님을 의지하는 참된 신앙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