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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마가복음 10강 

 

 

바리새인들의 누룩, 헤롯의 누룩 

 

 

말씀/ 마가복음 8:1-26

요절/ 마가복음 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경고를 받을 때 그리 유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고는 우리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참으로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1-3절을 보십시오.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오병이어 사건이 뱃새다 광야에서 일어난 반면 오늘 본문의 사건은 거라사 지방에서 일어났습니다. 벳새다에 모인 무리는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반면 이곳 거라사에 모인 무리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3일동안 말씀을 가르친 후 예수님은 그들이 배가 고픈 것을 보셨습니다.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는데 돌아가다가 너무 배가 고플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이에 그들을 먹이고자 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제자들은 “이 광야 어디에서 떡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그런 많은 양의 떡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오병이어 사건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처럼 말합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은 여러차례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전에 갈릴리 호수에 광풍이 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광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얼마 후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보며 제자들은 크게 놀라며 유령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동일한 사건 앞에서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때마다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사실 이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 기도하고 믿음을 체험했지만 또 다시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그 믿음이 어디 갔는지 또다시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연약한 우리의 실존입니다. 

 

5-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찾아온 것은 떡 일곱개, 작은 생선 두어 마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축사하시고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유대인도 먹이시지만, 이방인도 먹이시는 주님이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무리를 떠난 예수님은 달마누다, 곧 막달라 지방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을 힐난했습니다. 힐난(詰難)이란 “트집을 잡아 거북할만큼 따지고 든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것을 한번 고려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얼마나 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까? 중풍병자를 고쳐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거라사 청년으로부터 6천마리의 떼귀신을 몰아내셨습니다. 12년동안 혈루증 병을 앓은 여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를 보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나일강이 피로 변하고, 온 하늘을 뒤덮는 메뚜기 떼가 임하고, 천둥번개와 함께 어린애 머리통만한 우박이 떨어지고 대낮이 밤처럼 캄캄해지고, 온 나라의 큰 아들이 다 죽고, 홍해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4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때 표적을 구하고, 지혜를 찾는 것은 불신앙의 대표적 반응입니다.유대인들은 놀라운 10가지 표적, 거기에 더하여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에서 반석이 갈라져 물이 나오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놀라운 표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표적의 체험이 참된 믿음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표적의 체험으로 인한 깨달음과 감동이 생각보다 그리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뇌구조를 보면 과거에 보았던 것, 과거에 깨달았던 것은 지금 현재 눈에 보이는 것, 지금 현재 생각나는 것에 뒤덮이게 되어 있습니다. 컴퓨터 화면에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작업이 컴퓨터 화면을 전부 덮고 있어서 과거에 했던 작업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 약간 저속한 비유지만 사람은 화장실 들어가기 전의 마음과 화장실 나온 후 마음이 변하기 마련입니다. 대입을 앞둔 수험생이 급한 마음에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붙여주시면신앙생활 잘 하겠다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막상 합격하고 나면 그 기도를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직장을 구할 때, 주택 청약 당첨 때, 승진 심사 때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지만 기도가 응답된 후 그 기도를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현실 문제에 몰두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지식 혹은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헬라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지식과 지혜를 갖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된 지식과 지혜도 참된 신앙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지언정 근본적으로 그 지식과 지혜 자체가 참된 신앙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어떤 놀라운 지식도, 그 어떤 놀라운 지혜도 일단 한번 그것을 알게 되면, 깨닫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감흥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은 또다른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좇아 신앙을 떠나게 됩니다. 

 

이처럼 표적도 참된 신앙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지식과 지혜도 참된 신앙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참된 신앙을 줍니까? 참된 신앙을 가져다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표적을 추구하는 마음, 지적인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때 마음에 믿음이 생깁니다. 

 

표적을 통해 생긴 믿음, 지적인 깨달음을 통해 생긴 믿음과 비교하여 참된 믿음이 어떻게 다른지 아십니까? 표적을 통해 생긴 믿음, 지적인 깨달음을 통해 생긴 믿음은 아까도 말씀드렸듯 시간이 지나면 눈녹듯 사라집니다. 이에 비해 참된 믿음은 마치 살아있는 나무와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뿌리를 내리고 가지와 잎을 내고 성장합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죄와 악이 가득한 세상을 살다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거칠고 공격적입니까? 매너로 겉모습을 포장하지만 속에는 치열한 생존경쟁, 약육강식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살면서 마음이 상하고 지친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올 때,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은 다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좋은 날 우리가 왜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까?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듯 가장 먼저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충만한 믿음을 덧입기 위함입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을 덧입고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바리새인을 떠난 예수님은 다시 벳새다로 가는 배를 타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깜빡하고 떡을 챙기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떡이 딱 한 개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누룩은 발효를 하기 때문에 매우 적은 양으로도 전체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은 마치 호떡처럼 얇고 평평합니다. 이에 비해 누룩이 들어간 떡은 부풀어 올라 달달한 빵이 됩니다. 본래 누룩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누룩은 바리새인과 헤롯의 나쁜 영향력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2:1절을 보면 명확합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눅 12:1)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외식(外飾): 겉만 보기 좋게 꾸미어 드러냄” - 이렇게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이 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안식일의 정신을 생각하여 6일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 안에서 육신 뿐만 아니라, 마음의 참된 안식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런 안식일의 정신보다 안식일에 몇 걸음 이상 걷지 않기, 불을 끄거나 켜는 행위를 하지 않기, 무거운 것을 들지 않기, 한 글자 이상 쓰지 않기 등 겉보기에 드러나는 행위를 통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는 증거를 삼으려 했습니다. 또 이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자랑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사람을 평가할 때 철저하게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만나면 제일 먼저 어디에 사는지 물어봅니다. 부자 동네에 사는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사는지 확인합니다. 분당에 사는지, 어디 달동네에 사는지 확인한 후 그 사람의 경제력을 가늠하고 그것을 기초로 이 사람과 계속 관계성을 맺을 것인지, 관계성을 맺더라도 어떻게 대우할지를 결정합니다. 또 그 사람의 지적인 능력을 평가하는 잣대로 삼기 위해 어디 대학을 나왔는지, 전공은 무엇인지 물어봅니다. 남편은 어디 직장에 다니는지, 자녀는 어디 대학에 들어갔는지 자연스러움을 가장하여 이런 것들을 물어봄으로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끝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품이나 인격 - 이런 것들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범죄수준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만 않으면 OK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은 목사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계에서 다른 목사님을 만나 내가 목사라고 소개하면 교회 이름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 교회인지, 어느 교단에서 안수받았는지, 성도는 몇 명이나 되는지, 담임목사인지, 부목사인지 꼭 물어봅니다. 상대방 목사님은 내가 대답한 성도의 수에 따라 반응이 달라집니다. 몇 십명 대다 그러면 “별 볼일 없는 시시한 목사구나” 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백 명 이상이다 그러면 태도가 달라집니다. 천 명 대다 그러면 감탄과 존경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만 명 대다 그러면 아이돌 스타를 만난 것처럼 대우합니다. 아무리 큰 교회 목사여도 부목사다 그러면 “아, 네” 하면서 뭔가 가볍게 대합니다. 반면 작은 교회여도 "담임 목사입니다." 그러면 고개를 숙이면서 최소한의 존경의 표시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만났던 목사님들 중 이런 반응을 보인 분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안타깝게도 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기독교 통계연구소 자료를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 청년들의 카톨릭에 대한 호감도가 개신교에 비해 월등하게 높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개신교가 현대 자본주의에 물들어 보이는 반면 카톨릭은 뭔가 종교로서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실제 카톨릭 신부는 결혼을 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주님께 헌신하여 드리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또 능력이 많다고 큰 교구를 맡거나 능력이 부족하다고 작은 교구를 맡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저 본부에서 정해주는 대로 교구를 맡으며 또 순환근무를 합니다. 또 큰 교구를 맡았다고 해서 특별히 급여를 많이 받지도 않습니다. 모든 신부는 정해진 일정한 급여를 받습니다. 이런 점들이 오늘날 교회 목사보다 카톨릭 신부가 더 경건해 보이는 이미지를 준다는 것이 통계조사의 결론이었습니다. 

 

사실 카톨릭은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말씀 자체의 권위와 교황의 발언의 권위를 동등하게 봅니다. 또 예수님께 기도하지만 동시에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또 여러 성인들에게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카톨릭이 청년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는 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바리새인의 누룩, 자본주의의 누룩에 누렇게 떠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오늘 이 말씀은 가장 먼저 목회를 하는 저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제 카톡 프로필 문구는 팀 켈러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후임 사역자들에게 유언처럼 말한 다음과 같은 문장입니다. 

 

“Don’t make ministry success your identity.” 

“사역의 성공을 너의 정체성으로 삼지 말라” (Tim Keller)

 

제가 이 문장을 카톡 프로필 문구로 삼은 것은 부끄럽지만 제 안에 ministry success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Ministry success를 이루면 주변에서 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발언권도 강해지고 영향력도 커집니다. 팀 켈러 목사님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Ministry sucess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왜 있다가 없어질 것 위에 여러분의 삶과 사역의 기초를 놓으려 하십니까? 그러지 말고 영원히 변치 않으며 없어지지 않을 예수님과 복음 위에 여러분 삶과 사역의 기초를 세우십시오.”

 

그의 권면을 들으며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고 카톡 프로필 문구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문구를 정했다고 해서 “복음역사가 부흥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청년 제자 양성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 것입니다. 다만 기도하고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되, 결과를 통해 사람들에게 어필하려는 마음,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여줌으로 나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게 하려는 마음이 바리새인의 누룩이요,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헤롯의 누룩입니다. 헤롯의 누룩은 자명합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전부로 생각하고 세상의 부와 명예, 권력,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와같은 바리새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경계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제자들은 우리가 지금 떡을 깜빡 잊고 안 가지고 왔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지적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어이상실입니다. 이것은 마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아, 삶은 계란 찍어먹을 소금 깜빡했네.” 이렇게 반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오늘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십시오.” 하니까 “예배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효모 누룩 빵 사가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들이 이미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 특히 그들의 불신앙의 누룩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서 표적보다 중요한 것이 뭐냐면 주변 사람으로부터 받는 영향력입니다. 내 주변에, 특히 내 나이 또래 청년이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표적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이 있습니다. 요즘 청년들이 믿음을 갖기 어려운 이유가 이런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는 이들이 희귀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동료 스탭 목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생들이 전국 학생 수양회에 가면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특별히 학생 수양회 말씀이 엄청 좋다 이런 것보다 자기 또래 애들이 말씀을 전하고 소감발표하는 것을 들으며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 또래 애가 저렇게 믿음으로 사는 것을 보며 나도 저렇게 믿음으로 살고 싶다는 거룩한 소원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종로7부 청년팀은 어떠합니까? 혹시 서로에게 불신앙의 영향을 끼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다 같이 망하는 길입니다. 우리 종로7부 청년팀이 서로에게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목자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에게 불신앙의 영향을 끼치는대신 서로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7~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폭풍 책망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사랑이 많으시지만 세상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니까 효모 누룩 빵 사먹어야겠다 하는 제자들의 반응에 폭발하셨습니다. “눈이 있어도 안 보이냐? 귀가 있는데 안들리냐? 뇌는 어디 출장갔냐? 새대가리냐? 오병이어, 칠병이어 사건이 그렇게 기억이 안나냐?” 심하게 야단치셨습니다. 성경에 고상하게 글로 기록되어 있어서 그렇지 실제 현장에서 야단맞은 제자들은 거의 얼이 나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심하게 야단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다른 부족한 것들은 다 감당해 주시지만 믿음이 없는 것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른 것은 부족해도 믿음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향한 이 예수님의 마음은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좀 능력이 부족하고 때로는 좀 내면성이 부족하고, 그외 여러 부족한 것이 많아도 다 사랑으로 품고 감당해 주십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크게 야단을 치십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22~26절에서 예수님은 벳새다 맹인을 단계적으로 고쳐주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마음을 버리고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신 예수님과 복음의 반석 위에 인생의 기초를 놓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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